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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청(崔惟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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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직재(直哉)
시호(諡號)문숙(文淑)
생년1093(선종 10)
졸년1174(명종 4)
시대고려중기
본관동주(東州)
활동분야학자 > 유생
최석(崔奭)

[상세내용]

최유청(崔惟淸)
1093년(선종 10)∼1174년(명종 4). 고려의 학자‧문신. 본관은 동주(東州). 자는 직재(直哉).

6세조 최준옹(崔俊邕)태조를 도운 공신(功臣)이며, 문종순종선종 3조(三朝)를 섬긴 중신 최석(崔奭)의 아들이다.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학문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뒤에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인종초에 이자겸(李資謙)의 간계로 평장사(平章事) 한교여(韓皦如)가 유배될 때 매서(妹婿)인 정극영(鄭克永)과 함께 파직되었다.

이자겸이 몰락한 뒤에 내시(內侍)가 되고 좌사간(左司諫)상주수(尙州守)시어사(侍御史)를 역임하였다.

1132년(인종 10)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어사중승(御史中丞)전중소감(殿中少監)을 거쳐, 1142년 간의대부(諫議大夫)로서 금나라에 가서 책명(冊命)을 사(謝)하고 언동(言動)으로써 금인(金人)을 탄복시켰다. 이어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제수되었고 이어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승선(承宣)을 역임하였다.

1144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지공거(知貢擧) 한유충(韓惟忠)과 함께 진사(進士) 김돈중(金敦中) 등 26인에게 급제를 사(賜)하게 하였다.

1147년(의종 1) 한림학사(翰林學士)『서경』의 「열명(說命)」 3편을 의종에게 강설하였다. 이해에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御史大夫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이듬해 지추밀원사 판삼사사(知樞密院事判三司事)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1149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參知政事判尙書刑部事),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다.

1151년 판병부사(判兵部事)를 겸직하였으나 처남인 내시낭중(內侍郞中) 정서(鄭敍)와 왕의 동생 대령후(大寧侯) 경(暻)이 참소를 입은 사건에 연루되어 남경유수사(南京留守使)로 좌천되고 1157년 대령후 천안부(天安府)로 유배될 때 다시 충주목사(忠州牧使)광주목사(廣州牧使) 등으로 좌천되었다.

1161년 봉원전대학사(奉元殿大學士)가 되었으나 반대하는 자들이 있어 중서시랑평장사로 치사(致仕)하였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여러 무인들의 보호로 화를 면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여 다시 중서시랑평장사로 제배되고 1172년(명종 2) 수사공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守司空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로 치사하였다.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밝았고 불경(佛經)에도 조예가 깊었다.

『남도집(南都集)』『유문사실(柳文事實)』『최문숙공집(崔文淑公集)』『이한림집주(李翰林集註)』 등을 편하였으며, 시호는 문숙(文淑)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補閑集

[집필자]

박성봉(朴性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