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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영(鄭克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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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고(師古)
생년1067(문종 21)
졸년1127(인종 5)
시대고려중기
본관김포(金浦)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정극영(鄭克永)
1067년(문종 21)∼1127년(인종 5). 고려의 문신. 본관은 김포(金浦). 자는 사고(師古). 최유청(崔惟淸)의 매부이며, 한안인(韓安仁)의 외종제이다.

문과에 급제한 뒤 사록(司錄)에 보임되었는데, 정성(政聲)이 있어 정항(鄭沆)한충(韓沖)과 더불어 사록으로는 이정일한(二鄭一韓)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1118년(예종 13) 이지미(李之美)와 함께 송나라에 가서 권적(權適) 등의 제과(制科)와 송제(宋帝) 어필(御筆)의 조서(詔書)를 사(賜)한 것을 사례하였다.

이듬해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가 되고, 이듬해 청연각(淸讌閣)에서 『예기』 월령편을 강의하였다.

1120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예종이 풍악을 좋아한 것을 풍자한 국학생(國學生) 고효충(高孝沖)의 「감이녀(感二女)」라는 시를 왕에게 아뢰었다. 이무렵 당나라육지(陸贄)의 조신연방론(朝臣延訪論)에 입각하여 군신(群臣)의 연방을 요청하였다.

1122년 한림학사가 되어 인종이 즉위하자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박승중(朴昇中),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김부식(金富軾)과 더불어 『예종실록』 편수관(編修官)이 되었다.

이해 왕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의 반차(班次)의 예수(禮數)를 논의할 때 보문각학사로서 어사잡단(御史雜端) 최유(崔濡)와 더불어 이자겸이 상표(上表)하는데 신(臣)이라 일컫지 않게 하고, 군신의 연회에도 백관과는 다르게 바로 막차(幕次)에 나아가 절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중의(衆議)가 뇌동하고 김부식의 반대가 있었다. 한안인이자겸에 의하여 죽음을 당할 때 유배되었다. 이자겸이 몰락한 뒤 소환되어 1127년(인종 5) 동경유수사가 되고, 이어 판위위시사 한림학사 지제고(判尉衛寺事翰林學士知制誥)에 이르렀다.

문사(文詞)에 오묘하여 1118년 평장사 최홍사(崔弘嗣)를 따라 송나라에 갔을 때 그 저술이 중국인의 칭송을 받았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박성봉(朴性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