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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양(金致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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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009(현종 0)
시대고려전기
본관서흥(瑞興)
활동분야관료 > 권신

[상세내용]

김치양(金致陽)
미상∼1009년(현종 즉위). 고려 목종 때의 권신. 본관은 서흥(瑞興).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의 외척이다. 경종이 죽은 뒤 승려 행색으로 천추궁(千秋宮)에 출입하였으나, 추문이 있어 성종에 의해 멀리 장배(杖配)되었다.

그러나 목종이 즉위하자 실권을 쥔 천추태후에 의해 합문지후 통사사인에 임명되고, 곧 우복야 겸 삼사사가 되어 패서호족(浿西豪族)인 유행간(庾行間)이주정(李周禎)문인위(文仁渭) 등 친당을 조정에 포열시키는 등 권력을 휘둘렀다.

그리고 성종에 의해 구체화된 유교적 왕정체제에 반발하여 목종으로 하여금 네 차례나 서경행차를 하게 하였으며, 그때마다 방악(方嶽)과 주진(州鎭)의 신기(神祇)에 대한 재제(齋祭)의 의식을 가지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 출신지인 서흥성수사(星宿寺)라는 사당을 짓고, 또 궁성 서북에 시왕사(十王寺)를 지어 도교‧불교 및 토속신앙을 내세워 유교를 배척하고자 하였다.

1003년(목종 6)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생기자 그 아이를 왕위에 올리고자 당시 왕위계승에 가장 유력한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숭경사(崇敬寺)에 출가시켰다. 그리고 다시 대량원군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겨 은둔시킨 뒤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대량원군의 살해음모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마침내 병중에 있는 왕까지 제거하려고 1009년 천추궁 곁의 대부유고(大府油庫)에 불을 지르고 이 혼란을 틈타 목종 및 반대세력을 축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유충정(劉忠正)의 밀고로 그 음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왕은 재신(宰臣) 최항(崔沆)채충순(蔡忠順)황보 유의(皇甫兪義) 등에게 신혈사에 있는 대량원군을 맞아오게 하는 한편, 서북면도순검사 강조(康兆)에게 군사를 이끌고 입위(入衛)할 것을 명함으로써 저지하였다.

이 난의 수습을 계기로 실권을 쥔 강조에 의해 그는 아들과 함께 살해되고, 그 일당과 천추태후는 섬으로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金致陽亂의 性格(李泰鎭, 韓國史硏究 17, 1977)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대표명김치양(金致陽)
성명김치양(金致陽)

성명 : "김치양(金致陽)"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