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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康兆)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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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010(현종 1)
시대고려전기
활동분야무신 > 무신

[상세내용]

강조(康兆)
미상∼1010년(현종 1). 고려의 무신. 황해도 지방의 토성(土姓)이나 본관은 분명하지 않다.

목종중추사 우상시(中樞使右常侍)로서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가 되었다.
1. 김치양의 음모
1009년(목종 12)김치양(金致陽)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난을 일으킬 때, 목종의 명을 받고 궁궐수비를 위해 개경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개경에 도착하기 전동주(洞州)용천역(龍泉驛)에 이르렀을 때 죄를 저질러 조정에서 쫓겨난 뒤 항상 화난을 일으키려고 벼르고 있던 내사주서(內史注書) 위종정(魏從正)최창회(崔昌會)가 거짓으로 전한 개경소식을 듣고, 자신이 천추태후에 의한 함정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여 서둘러 본영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마침 천추태후는 군사들이 오는 것을 꺼려 내신을 보내어 절령(岊嶺)을 막고 사람의 내왕을 차단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걱정한 부친은 종을 승려로 변장시켜 죽장(竹杖)속에 서신을 보내 아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에 와 국난을 평정하도록 하였다.

이 편지를 받자 목종이 세상을 떠난 줄 알고 부사(副使)이부낭중(吏部郞中) 이현운(李鉉雲) 등과 함께 갑졸(甲卒) 5천인을 거느리고 황해도 평주에 이르렀으나, 왕이 세상을 떠나지 않은 사실을 알고 군사이동을 멈추게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이제 와서 주저할 수 없다고 하자, 목종을 폐하고 새 왕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개경으로 들이닥쳤다.

궁궐을 점령한 뒤 황보유의(皇甫兪義)김응인(金應仁)을 시켜 김치양 일파에 의해 신혈사(神穴寺)로 쫓겨나 있던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보내 도망간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庾行簡) 등 7인을 죽이고, 천추태후의 친속 30여인을 귀양보냈다.

또한, 목종은 폐위시켜 태후와 함께 충주로 보내는 도중 상약직장(尙藥直長) 김광보(金光甫)를 시켜 시해하게 함으로써 대권을 쥐었다.
2. 대권쟁취의 노력
그뒤 새로운 국가기강을 위해 실시한 관제개혁에서 은대(銀臺)중추(中樞) 남북원(南北院)을 일시에 혁파하고 대신 중대성(中臺省)을 설치하여 세 관청의 기무를 이에 소속시켰다. 혁파된 은대중추원은 국왕의 측근보좌기구임과 동시에 그동안의 정치가 모두 이 기관을 통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조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계속된 관직개편에서 자신은 중대사(中臺使)에 오르고 중대부사(中臺副使)이현운, 직중대(直中臺)채충순(蔡忠順), 상서우승 겸 직중대(尙書右丞兼直中臺)윤여(尹餘)를 임명하였다. 이러한 인사조처는 국왕 측근직의 단일화를 꾀하는 것이나 실제는 군사권을 배경으로 한 자신의 권력집중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더욱이 1009년(현종 즉위) 3월 이부상서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어 당시 제일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거란의 침입으로 그의 대권은 제대로 행사하지도 못하고 좌절되었다.
3. 거란의 칩입과 대권확보 실패
즉, 1010년 11월, 거란성종(聖宗)목종을 죽인 죄를 묻겠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워 쳐들어왔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지난 993년(성종 12) 제1차침입 때 강동육주(江東六州)의 영유권을 고려에 넘겨주었다는 것과 고려송나라와 화친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이에 그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가 되어 거란군과 맞서 싸웠다.

즉, 양규(楊規)이수화(李守和)의 용전으로 흥화진(興化鎭) 전투를 단념하고 통주(通州)로 내려온 거란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통주성 남쪽까지 와서 물을 사이에 두고 세 군데 진을 치게 하고 거란군이 중앙을 찌르면 양쪽에서 호응하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번번이 승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무기인 검차(劒車)를 만들어 거란군을 대파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승리에 자만심이 쌓여 거란군이 공격해온다는 보고를 듣고도 경계를 하지 않다가 결국 같은해 11월 수많은 적군이 들이닥치자 대항할 겨를도 없이 패하고 말았다.

이때의 패전으로 많은 병사가 죽고, 부장(副將) 이현운,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 양경(楊景), 이성좌(李成佐) 등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포로가 되어 자신의 신하가 되어달라는 거란 성종의 권유에, “나는 고려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는가?” 하며 단호히 거절하여 고려인의 늠름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현운성종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자 발길로 차면서 고려인의 긍지를 잃지 말라고 나무랐다는 일화를 남기고 최후를 마쳤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時代史(金庠基, 東國文化社, 1961)
金致陽亂의 性格(李泰鎭, 韓國史硏究 7, 1977)
高麗穆宗朝の禍亂(池內宏, 東洋學報 9―3, 1919)
契丹聖宗の高麗征伐(池內宏, 滿鮮史硏究 中世 2, 1937)

[집필자]

진성규(秦星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