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흠돌(金欽突)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D760B3CCD0681X0
생년?(미상)
졸년681(신문왕 1)
시대통일신라
활동분야군인 > 장군

[상세내용]

김흠돌(金欽突)
미상∼681년(신문왕 1). 신라통일기의 장군.

가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딸이 신문왕비가 된 것을 보면 왕과 가까운 혈족이었을 것이다.

김유신(金庾信)김인문(金仁問)을 도와서 고구려 정벌에 큰 공을 세운 대표적인 장군이다.

661년(문무왕 1) 7월의 고구려 원정군 편성에 김인문김진주(金眞珠)와 같이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참여하여, 김유신을 도와 시이곡정(始飴谷停)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백제 잔민의 반란 진압이 급선무였고, 또한 군량미 보급이 주임무여서 중도에서 회군하였다.

668년 6월에 대아찬(大阿飡)으로서 그는 김인문김흠순(金欽純)천존(天存)문충(文忠)진복(眞福)지경(智鏡)양도(良圖)개원(愷元) 등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전국의 총관과 병마를 동원한 가운데 고구려 정벌을 떠났다.

그해 9월에 평양성을 함락하였으며, 출정의 공으로 파진찬(波珍飡)이 되었다. 곧이어 소판(蘇判)으로 승진되었으나, 그뒤의 기록은 없다. 딸이 신문왕비가 되었으나,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681년(신문왕 1) 8월에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모반을 꾀하다 주살되었다. 곧이어 그 딸도 폐출되었으며, 신문왕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모반죄목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김군관(金軍官)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신문왕의 교서 내용뿐이다.

즉, 왕의 장인으로 역모를 하였으며, 이를 고발하지 않았다고 병부령김군관이 처형된 것을 보면 상당히 큰 사건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신문왕의 전제왕권 확립이나 제도정비 및 율령정치 구현의 한 과정에서 나타난 사건인 것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불휼국사(不恤國事)나 수명망구(授命忘軀) 등 7세기 이후 더욱 강화된 유교정치이념의 확립과 투철한 국가관이라는 사실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新羅時代叛逆의 歷史的 性格(姜聲媛, 韓國史硏究 43, 1983)

[집필자]

신형식(申瀅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