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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원(金愷元)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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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예원(金禮元)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신라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왕실 > 왕족
문명왕후(文明王后)

[상세내용]

김개원(金愷元)
생졸년 미상. 신라의 왕족. 이름을 ‘예원(禮元)’이라고도 하였다.

부친은 태종무열왕이고, 모친은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으로 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된 문희(文嬉)이다. 형으로는 문무왕이 된 김법민(金法敏)을 비롯해서 김인문(金仁問)김문왕(金文王)김노차(金老且)김지경(金智鏡) 등이 있다.

655년(태종무열왕 2) 맏형인 법민이 태자로 책봉되자, 지경과 함께 이찬(伊飡)에 임명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그의 관등승진순서에 비추어볼 때 아찬(阿飡)의 잘못일 것이다.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條)에 의하면 “태자 법민, 각간 인문문왕노차지경개원 등은 모두 문희의 소생이고, 그밖에 서자 개지문급간(皆知文級干)차득령공(車得令公)마득아간(馬得阿干)과 딸 다섯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삼국사기』 진덕여왕 2년조에서는, 김춘추당나라 태종에게 주청하기를 “신에게 아들이 일곱이 있으니, 원컨대 성명(聖明)의 곁을 떠나지 않고 숙위하도록 하겠읍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일곱명이라 함은 『삼국유사』의 적출 여섯명에 어느 아들을 더 말함인지 알 수가 없다.

667년(문무왕 7)에 당나라 고종이 칙명으로 “지경개원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역(役)에 보내라.” 하니 문무왕이 곧 지경파진찬(波珍飡)으로 삼고, 개원대아찬(大阿飡)으로 삼아 고구려정벌에 출전시켰다.

이듬해인 668년 6월에는 대당총관(大幢摠管)에 임명되었다.

671년 1월에는 이찬으로서 중시(中侍)에 임명되어, 2년 7개월간 재임하였다.

683년(신문왕 3)에는 왕이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맞아 부인을 삼으려 하자, 이찬 김문영(金文穎)과 함께 김흠운의 집에 가서 그의 딸을 부인으로 책봉하기도 했다.

695년(효소왕 4)에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는데, 706년(성덕왕 5) 인품(仁品)이 새로 상대등에 임명될 때까지 상대등직에 있었던 듯싶다.

또는, 706년에 김개원이 사망했기에 상대등이 교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719년에 만들어진 경주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나 「감산사미륵보살조상기(甘山寺彌勒菩薩造像記)」에서 김개원성덕왕과 함께 발원자인 김지성(金志誠)의 추복(追福)대상으로 등장하고 있어, 그 해석에 따라서는 719년 직전이나 그 이후까지 생존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政治社會史硏究(李基白, 一潮閣, 1974)
韓國金石全文(許興植, 亞細亞文化社, 1984)
新羅史の諸問題(末松保和, 東洋文庫, 1954)

[집필자]

정중환(丁仲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