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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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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402(고구려: 광개토왕 12/백제: 아신왕 11/신라: 내물마립간 47, 실성마립간 1)
시대신라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왕실 > 왕
말구(末仇)
휴례부인(休禮夫人)
보반부인(保反夫人)

[상세내용]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미상∼402년. 신라 제17대왕. 재위 356∼402년. 성은 김씨.
1. 계보 및 왕보
의 손자이며,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다.

모친은 휴례부인(休禮夫人) 김씨이고, 왕비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 김씨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미추이사금의 사위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의 왕력(王曆)에는 미추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갈문왕의 아들, 또는 미추이사금의 동생인 각간 말구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여 미추이사금의 동생 또는 조카로도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계보는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다만 미추이사금과 일정한 근친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흘해이사금이 후계자가 없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왕호는 『삼국사기』에는 ‘이사금(尼師今)’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마립간’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내물왕 때에 ‘마립간’의 왕호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여 『삼국유사』의 설을 따르고 있다.

마립간은 수석장(首席長) 또는 후세의 군장(君長)에 대한 존칭어인 상감(上監)에 해당하는 왕호로 짐작되고 있다. 왕호가 마립간이었다는 사실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斯盧國)이 국가적 면모를 일신하여 국가체제가 정비됨으로써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존엄성이 있는 왕호가 필요해진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로써 내물마립간신라의 귀족들인 대등(大等)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가 중앙정청(中央政廳)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남당(南堂)’에서 주재하는 명실상부한 최고통치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또한 내물마립간 이후부터는 박(朴)‧석(昔)‧김(金)의 삼성(三姓)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현상이 없어지고, 김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현상도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2. 중국문물수입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내물마립간의 이러한 체제내적인 정비는 중국과의 국제관계에도 관심을 가지게 하여, 377년(내물마립간 22)과 382년의 두 차례에 걸쳐서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부견(苻堅)의 전진(前秦)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382년에 전진에 사신으로 파견된 위두(衛頭)와 전진의 왕 부견 사이의 대화는 당시 신라의 사정을 살피는 데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인용되어 있는 『진서(秦書)』의 기사에 의하면 “그대가 말하는 해동(海東: 新羅)의 일이 예와 같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라는 부견의 질문에 대하여 위두는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名號)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사회에 변화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사회의 변화도 당연하다는 것으로서 신라의 고대국가체제 정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와같은 신라와 전진과의 외교관계는 곧바로 중국문물 수입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국가체제정비의 허실
내물마립간대에 와서 신라가 고대국가체제를 완성하게 되는 계기는 백제 근초고왕마한 정복과 백제군의 낙동강유역으로의 진출이 신라에 자극을 주었을 것이라는 데서 우선 찾아져야 할 것이다.

당시의 백제는 왜(倭)와 연합한 다음 왜병을 끌어들여 364년과 393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를 침범하게 되자 이들에 대항할 목적으로 신라 내부를 통합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고, 그러한 결과로서 체제정비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 단독으로는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을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신라는 우호적 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399년에 내물마립간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자 고구려광개토왕은 그 이듬해 5만명의 보병‧기병 군사를 신라의 국경지대로 파견하여 백제군과 연합한 왜군을 크게 격파한 일이 있었다.

한편 이와같은 고구려신라에 대한 군사적 지원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자주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즉, 고구려와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392년에는 내물왕고구려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야 하였으며, 401년에 고구려로부터 귀국한 실성내물마립간이 죽은 뒤에 여러 아들들을 배제시키면서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도 고구려의 압력이 배후에서 작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런 만큼 신라내물마립간 때에 대내적으로는 비록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대외적으로는 아직 고구려에 대하여 군사적 지원을 요청해야 하였고, 그 결과 내정간섭을 받을 정도로 자주적인 발전 기반을 확고히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내물마립간 때에는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문하거나, 흉년이 든 하슬라(何瑟羅: 지금의 江陵) 지방의 1년 동안의 세를 면제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백제독산성주(禿山城主)가 300명의 주민을 이끌고 투항하자 백제와의 외교문제가 있었으나 이를 받아주었으며, 동북경지방에서는 말갈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大等考(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古代南堂考(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집필자]

김영하(金瑛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