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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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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실성왕(實聖王)
생년?(미상)
졸년417(실성마립간 16)
시대신라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왕실 > 왕
대서지(大西知)
이리부인(伊利夫人)
아류부인(阿留夫人)
외조부석등보(昔登保)

[상세내용]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미상∼417년(실성마립간 16). 신라 제18대 왕. 재위 402∼417년. 성은 김씨(金氏). 알지(閼智)의 후손으로서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이다. 모친은 아간(阿干) 석등보(昔登保)의 딸인 이리부인(伊利夫人)이며, 왕비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아류부인(阿留夫人)이다.

왕은 신장이 7척(尺) 5촌(寸)으로 매우 컸으며, 명민하고 지혜가 많았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왕호가 이사금(尼師今)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처럼 내물왕 이래 마립간을 왕호로 사용하였다고 생각되므로 실성마립간이 옳은듯하다.

내물왕이 죽은 뒤 그 아들들이 나이가 어리므로 화백회의에서 실성을 추대하여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내물왕실성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내물왕을 원망하였다고 한 사실과 그가 401년(내물왕 46)에 고구려로부터 귀국한 다음해에 내물왕이 죽자 내물왕의 왕자들을 제쳐놓고 즉위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왕위계승에는 고구려의 군사적 후원이 작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403년(실성이사금 2)에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서 미사품(未斯品)을 서불한(舒弗邯: 伊伐飡)으로 삼고 군국(軍國)의 일들을 위임하여 통치하였다. 외교적인 측면에서는 왜와의 화호(和好)를 위해서 402년에는 내물왕의 왕자인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보내고, 412년에는 고구려와의 우호적 관계 유지를 위해서 내물왕의 왕자인 복호(卜好)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실성왕의 인질외교(人質外交)는 왜와 고구려 양국과의 관계개선 내지 관계유지라는 대외적인 명분도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전왕인 내물왕이 왕자들을 외국에 볼모로 보냄으로써 내물왕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실성왕계를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와는 관계개선을 위한 외교적 노력 이외에 405년에는 왕이 친히 기병을 이끌고 명활성(明活城)에 침입해온 왜병을 맞아 싸워서 300여명을 참획(斬獲)하는 군사적 응징도 가하였다. 이밖에 413년에는 평양주(平壤州: 지금의 楊州)에 큰 다리를 준공하는 치척도 있었다.

실성왕내물왕의 태자인 눌지(訥祗)가 덕망이 있어서 자기의 왕권을 위협하므로 고구려의 힘을 이용하여 눌지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고구려눌지를 지원하여 정변을 일으켜서 실성왕은 살해되었다. 이 정변으로 말미암아 실성왕의 모계인 석씨세력은 김씨계에 의하여 철저히 타도되어 소멸하게 되었다. 실성왕에 뒤이어 내물왕계인 눌지왕이 즉위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國家形成史硏究(李鍾旭, 一潮閣, 1982)
新羅上代의 Dual Organization(金哲埈, 歷史學報 1952)
新羅奈勿王系의血緣意識(李基東, 歷史學報 53‧54, 1972)
新羅國家形成過程의 硏究(文暻鉉, 大丘史學 6, 1973)

[집필자]

김영하(金瑛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