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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近肖古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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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375(고구려: 소수림왕 5/백제: 근초고왕 30, 근구수왕 1/신라: 내물마립간 20)
시대백제
활동분야왕실 > 왕

[상세내용]

근초고왕(近肖古王)
미상∼375년. 백제 제13대왕. 재위 346∼375년.
1. 왕권강화
비류왕의 아들. 일본『고사기(古事記)』에는 ‘조고왕(照古王)’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초고왕(肖古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즉위한 뒤 왕권의 강화와 확립에 주력하여 왕위계승에 있어서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는 왕과 아들 근구수왕(近仇須王)의 왕명이 초고왕구수왕에 ‘근(近)’자를 가하여 이루어진 데서 알 수 있다.

또, 진씨가문(眞氏家門)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에 대한 통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영역을 분정(分定)하여 지방통치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로써 왕은 중앙집권화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2. 정복활동
한편, 근초고왕은 왕권확립을 바탕으로 하여 사방으로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정복활동을 살펴보면, 남으로는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을 경략,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지역 모두를 지배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가야세력에도 손을 뻗쳐 이들을 부용(附庸)하게 함으로써 영향권내에 넣었다. 이렇게 남방지역의 평정이 일단락된 후 북방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북진은 당시 남진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雉壤城: 황해도 배천)싸움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절정은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平壤城)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태자와 더불어 정기(精騎)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고구려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고지(帶方故地)까지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3. 대외활동
근초고왕은 정복활동과 더불어 대외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관계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이룩하였으며, 중국동진(東晉)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동진으로부터 영동장군영낙랑태수(領東將軍領樂浪太守)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 요서지방(遼西地方)으로 진출하여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백제요서지역 진출은 요동지역으로 진출하여오는 고구려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의 무역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열도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하여 백제계통의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백제와 일본열도의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온 ‘칠지도(七支刀)’가 있다.

이 칠지도는 당대의 금석문자료로서 칼에 새겨진 명문(銘文)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그 내용의 핵심은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에 만들어졌고 백제의 후왕(侯王)인 왜왕(倭王)에게 하사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백제가 위치한 지정학적인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고대상업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대(漢代)이래 중국 황해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해안으로, 다시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는 한족의 동방침입과 동시에 고대상업로로서도 중요한 길이었다. 그런데 낙랑군‧대방군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水路)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교통로와 상업로는 백제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백제요서지역에 설치한 무역기지와 한반도와 일본지역에 자리한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여 고대상업망을 형성함으로써 무역의 중심구실을 하게 되었다.
4. 문화의 진흥
또, 문화의 진흥과 일본으로의 전수면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대방지역을 점령하면서 중국계 사람들을 포섭하여 백제문화의 질을 높였고 나아가 일본열도에 새로운 문물을 전수하여주었다. 그 좋은 예로서는 왕인(王仁)아직기(阿直岐) 등을 일본에 보내어 『천자문』『논어』를 전해줌으로써 일본에 유학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지배영역의 확대와 통치조직의 정비를 통하여 왕권이 확립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자, 이와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박사(博士)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서기(書記)』라는 국사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의 편찬은 왕실중심의 계보정리와 더불어 왕실전통의 유구성과 신성성을 과시하고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서 취해진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하여 근초고왕대는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晉書
宋書
日本書紀
韓國古代史의 硏究(李弘稙, 新丘文化社, 1971)
韓國古代史硏究(李丙燾, 博英社, 1976)
百濟王位繼承考(李基白, 歷史學報 11, 1959)
百濟의 遼西經略(金庠基, 白山學報 3, 1967)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方善柱, 白山學報 11, 1971)
百濟社會와 그 文化(金哲埈, 武寧王陵發掘調查報告書, 1973)
復元加耶史 上‧中‧下(千寬宇, 文學과 知性, 1977‧1978)
漢城時代百濟의 地方統治體制―檐魯體制를 중심으로―(魯重國, 邊太燮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5)

[집필자]

노중국(盧重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