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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희(韓重熙)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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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희보(熙甫)
생년1661(현종 2)
졸년1723(경종 3)
시대조선중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한빈(韓彬)

[상세내용]

한중희(韓重熙)
1661년(현종 2)∼1723년(경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희보(熙甫). 첨지중추부사 한빈(韓彬)의 아들이다.

1691년(숙종 17) 사마시를 거쳐, 1702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1704년 정언이 되었다.

1705년 정월 궁방하인들의 작폐(作弊)에 대하여 상소하고, 그해 2월 사서를 거쳐 문학지평이 되었다. 같은해 8월 과거의 폐단에 대하여 다시 상소하고, 1707년에는 대신접대에 있어 임금의 예모부족(禮貌不足)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710년 장령이 되었고, 1712년 오수원사건(吳遂元事件)을 소론(疏論)하였으며 1713년에는 유혁연사건(柳赫然事件)을 임금에게 자세히 아뢰었다. 같은해 7월 헌납(獻納)이 되었고, 사은사의 정사 임창군(臨昌君) 혼(焜), 부사 권상유(權尙游)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온 뒤 논사소(論事疏)를 올려 북막평사(北幕評事)의 임명을 신중히 할 것을 간하였다.

1715년 보덕이 되었고, 1716년 동래부사로 있으면서 대마도에서 요구한 인삼무역을 임금님에게 아뢰어 이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경상어사 이명언(李明彦)의 복명에 따라 행정실책으로 문책을 당하여 파출되었다. 같은해 일본통신사에게 주어 보내는 문서의 문자표시문제를 해결하였고, 1718년에는 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승지로 동궁에 입대(入對)하여 세자의 감정통제에 대하여 진달하였고, 1720년 숙종국상에 정재륜(鄭載崙)이 숙직을 하면서도 성기(省記)가 없는 것을 문책하도록 세자(뒤의 경종)에게 상소하였다.

1721년(경종 1) 11월 강원감사를 지냈고, 이듬해 김동필(金東弼)의 상소에 김일경(金一鏡)의 일로 논란이 있다가 1723년 11월 간원(諫院)의 탄핵을 받았다. 곧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한 뒤 고향에 돌아가 죽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國朝榜目
知守齋集

[집필자]

송준호(宋寯鎬)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