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좌(羅弘佐)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098D64DC88CB1649X0 |
자(字) | 제백(濟伯) |
생년 | 1649(인조 27) |
졸년 | 1709(숙종 3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안정(安定)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부 | 나성원(羅星遠) |
증조부 | 나만갑(羅萬甲) |
외조부 | 권순창(權順昌) |

[관련정보]
[상세내용]
나홍좌(羅弘佐)
1649년(인조 27)∼1709년(숙종 35).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제백(濟伯).
증조부는 참의 나만갑(羅萬甲), 부친은 나성원(羅星遠)이며, 모친은 동지중추 권순창(權順昌)의 딸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었으나 무예를 닦아 선전관을 비롯하여 총부도사(摠府都事)‧훈련원정을 거쳐, 1685년(숙종 11) 내금위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풍기를 문란시켰다고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첨추(僉樞)‧훈련도감중군‧훈련대장 겸 총관총융사를 거쳐 훈련도정 겸 주사당상이 되었다.
1699년 어영대장을 거쳐 한성좌윤에 임명되고 이듬해 포도대장이 되었다. 외직으로는 중화부사(中和府使)‧서흥현감‧봉산군수‧여산토포사(礪山討捕使)‧숙천부사‧춘천방어사‧정주목사‧해미현감‧영흥부사‧함경남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삼도통제사에 제수되었다.
1699년 노‧소론간의 대립으로 과옥(科獄)이 일어나자 이듬해 포도대장으로 과옥을 안치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무고를 입고 용천(龍川)에 유배되었다.
1703년에 김창집(金昌集) 등 대신들의 변론을 통하여 풀려나서 춘천방어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수원방어사에 부임하였으나 곧 사직하였다.
인품은 충효가 돈독하고 식견과 도량이 넓고 청약간엄(淸約簡嚴)하였으며, 특히 청송(聽訟)이 공평하고, 지방의 황폐한 곳을 잘 다스렸다.
증조부는 참의 나만갑(羅萬甲), 부친은 나성원(羅星遠)이며, 모친은 동지중추 권순창(權順昌)의 딸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었으나 무예를 닦아 선전관을 비롯하여 총부도사(摠府都事)‧훈련원정을 거쳐, 1685년(숙종 11) 내금위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풍기를 문란시켰다고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첨추(僉樞)‧훈련도감중군‧훈련대장 겸 총관총융사를 거쳐 훈련도정 겸 주사당상이 되었다.
1699년 어영대장을 거쳐 한성좌윤에 임명되고 이듬해 포도대장이 되었다. 외직으로는 중화부사(中和府使)‧서흥현감‧봉산군수‧여산토포사(礪山討捕使)‧숙천부사‧춘천방어사‧정주목사‧해미현감‧영흥부사‧함경남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삼도통제사에 제수되었다.
1699년 노‧소론간의 대립으로 과옥(科獄)이 일어나자 이듬해 포도대장으로 과옥을 안치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무고를 입고 용천(龍川)에 유배되었다.
1703년에 김창집(金昌集) 등 대신들의 변론을 통하여 풀려나서 춘천방어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수원방어사에 부임하였으나 곧 사직하였다.
인품은 충효가 돈독하고 식견과 도량이 넓고 청약간엄(淸約簡嚴)하였으며, 특히 청송(聽訟)이 공평하고, 지방의 황폐한 곳을 잘 다스렸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대표명 | 나홍좌(羅弘佐) |
성명 | 나홍좌(羅弘佐) |
성명 : "나홍좌(羅弘佐)"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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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