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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니(金柅)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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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지중(止中)
호(號)유당(柳塘)
생년1540(중종 35)
졸년1621(광해군 13)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학자 > 유생
김진(金璡)
강릉진씨(江陵陳氏)
외조부진담(陳霮)
출생지신성촌(新成村)
공신호선무공신(宣武功臣)

[상세내용]

김니(金柅)
1540년(중종 35)∼1621년(광해군 13).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지중(止中), 호는 유당(柳塘).

한성신성촌(新成村)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계공랑(啓功郞) 김진(金璡)이며, 모친은 강릉진씨(江陵陳氏)로 생원 진담(陳霮)의 딸이다.

1547년(명종 2)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으로 안변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백인걸(白仁傑)을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겼다. 학문이 크게 진전되어 명성이 높았으므로 함경도관찰사김광진(金光軫)이 맞이하여 자질을 교육시켰다.

1576년(선조 9) 사마시에 합격했다. 처음 도시(道試)에 장원하여 전시(殿試)에 나가고자 하다가 어머니의 병으로 나가지 못했다.

158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585년 영흥훈도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성균관박사를 지내고 곧이어 전적이 되었다.

1588년 승문원교검교리응교수찬 등을 역임했다.

그뒤 명천현감김화현감을 지내면서 많은 인재를 육성하고 풍속을 바로잡아 선정을 베풀었다. 어사의 보고로 군자감판관에 승차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군대를 거느리고 김응서(金應瑞)와 진두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선무공신(宣武功臣)에 기록되고 청백리에 뽑혔다.

1603년 주사대장(舟師大將)담양부사 등을 역임하고, 1611년(광해군 3) 공조참의가 되었다.

1612년 천추사(千秋使)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병조참판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유당집』이 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柳塘集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