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曺淑)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870C219FFFFU9999X0 |
자(字) | 선경(善卿) |
호(號) | 죽헌(竹軒) |
생년 | 1504(연산군 10) |
졸년 | 1582(선조 15)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창녕(昌寧)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승로(曺承老) |
외조부 | 이계보(李季寶) |

[관련정보]
[상세내용]
조숙(曺淑)
1504년(연산군 10)-1582년(선조 15).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선경(善卿)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부친은 조승로(曺承老)는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지냈으며, 문행(文行)으로 천거(薦擧)되어 훈도(訓導)가 된 인물이다. 모친은 강양이씨 이계보(李季寶)의 딸이다.
어려서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연(李蓮)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석천(石泉) 임득번(林得蕃)에게 수학하면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문하(門下)에 들어가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김인후는 그에게 『소학(小學)』을 학문의 근본으로 할 것을 일러주었다.
1531년(중종 2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540년(중종 3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이후, 저작 박사(著作博士),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전적(典籍) 등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이 되었으며, 1543년(중종 38)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강론(講論)하였다. 이후 다시 예조좌랑(禮曹佐郞),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을 지내고, 광양현감(光陽縣監)이 되어 향읍을 교도하는데 치적을 남겼다.
이후 호조정랑(戶曹正郞), 응교(應敎)를 거쳐 흥양(興陽), 영암(靈巖), 광주(光州)의 수령(守令)을 거쳤다. 선조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가, 임천(林泉)에 은퇴하여 성리학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퇴계 외에도 노수신(盧守愼), 이윤경(李潤慶), 소세양(蘇世讓), 정유길(鄭惟吉)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부친은 조승로(曺承老)는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지냈으며, 문행(文行)으로 천거(薦擧)되어 훈도(訓導)가 된 인물이다. 모친은 강양이씨 이계보(李季寶)의 딸이다.
어려서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연(李蓮)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석천(石泉) 임득번(林得蕃)에게 수학하면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문하(門下)에 들어가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김인후는 그에게 『소학(小學)』을 학문의 근본으로 할 것을 일러주었다.
1531년(중종 2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540년(중종 3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이후, 저작 박사(著作博士),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전적(典籍) 등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이 되었으며, 1543년(중종 38)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강론(講論)하였다. 이후 다시 예조좌랑(禮曹佐郞),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을 지내고, 광양현감(光陽縣監)이 되어 향읍을 교도하는데 치적을 남겼다.
이후 호조정랑(戶曹正郞), 응교(應敎)를 거쳐 흥양(興陽), 영암(靈巖), 광주(光州)의 수령(守令)을 거쳤다. 선조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가, 임천(林泉)에 은퇴하여 성리학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퇴계 외에도 노수신(盧守愼), 이윤경(李潤慶), 소세양(蘇世讓), 정유길(鄭惟吉)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참고문헌]
竹軒先生文集
[집필자]
김성수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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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