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호(尹世豪)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4C138D638B1470X0 |
자(字) | 사영(士英) |
시호(諡號) | 공간(恭簡) |
생년 | 1470(성종 1)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파평(坡平)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윤지준(尹之峻) |
[관련정보]
[상세내용]
윤세호(尹世豪)
1470년(성종 1)∼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사영(士英). 직장 윤지준(尹之峻)의 아들이다.
1503년(연산군 9)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검열‧형조정랑을 거쳐 1508년(중종 3) 지평, 1509년 집의‧응교를 역임하고 임피(臨陂)에 어사로 파견되었다.
1514년 승지, 1517년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518년 대사헌에 이어 진향사(進香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19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20년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조광조(趙光祖)의 죽음을 의문시하고 그를 애도하였다 하여 김식(金湜)의 사건에 연루되고 조광조일파로 몰려 파직되었다.
1524년 평안부사로 치적이 있어 향표리(鄕表裡) 1습(襲)을 하사받았고, 1526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삼척‧진주 등의 지방관으로 전전하였다.
1531년 삼간(三奸)이라 불리던 심정(沈貞)‧이항(李沆)‧김극픽(金克愊) 등이 파직되자 다시 중앙으로 등용되어 1532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1537년 성주목사에 이어 1539년 지중추부사‧공조판서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를 다녀온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1503년(연산군 9)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검열‧형조정랑을 거쳐 1508년(중종 3) 지평, 1509년 집의‧응교를 역임하고 임피(臨陂)에 어사로 파견되었다.
1514년 승지, 1517년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518년 대사헌에 이어 진향사(進香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19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20년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조광조(趙光祖)의 죽음을 의문시하고 그를 애도하였다 하여 김식(金湜)의 사건에 연루되고 조광조일파로 몰려 파직되었다.
1524년 평안부사로 치적이 있어 향표리(鄕表裡) 1습(襲)을 하사받았고, 1526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삼척‧진주 등의 지방관으로 전전하였다.
1531년 삼간(三奸)이라 불리던 심정(沈貞)‧이항(李沆)‧김극픽(金克愊) 등이 파직되자 다시 중앙으로 등용되어 1532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1537년 성주목사에 이어 1539년 지중추부사‧공조판서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를 다녀온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淸選考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淸選考
[집필자]
김용덕(金龍德)
성명 : "윤세호(尹世豪)"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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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