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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유(金永濡)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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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택부(澤夫)
시호(諡號)공평(恭平)
생년1418(태종 18)
졸년1494(성종 25)
시대조선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공신호원종공신(原從功臣)

[상세내용]

김영유(金永濡)
1418년(태종 18)∼1494년(성종 2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택부(澤夫).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김점(金漸)의 손서(孫婿)이다.

1438년(세종 20) 생원시에 합격하고 1447년(세종 29)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사선주부(司膳注簿)로 재직중에 진하사검찰관(進賀使檢察官) 유자문(柳子文)이 경천참(敬天站)에서 병으로 죽자, 감찰이 되어 그의 후임으로 연경을 다녀왔다.

이듬해 우정언이 되었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판관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곧이어 가자되고, 1457년(세조 3) 평양소윤으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자산(慈山)사람 임유기(任有紀) 등의 무고로 의금부에 압송중인 자산읍 수령을 전송하며 위로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곧 성균관사예에 복직되었다.

1465년 승문원판사로서 경차관의 임무를 띠고, 황해도에 파견되어 포로된 적을 치죄하였다.

1466년 성균관대사성호조참의를 거쳐 성절사(聖節使)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황해도관찰사예조참의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73년(성종 4) 예조참판으로서 성종의 생부의 것인 의경왕묘(懿敬王廟)의 조성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동지중추부사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왜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1476년 공조참판으로 사은사 판중추부사 박중선(朴仲善)의 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대사헌예조참판전라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85년 개성유수로 파견된 뒤 2년간에 걸쳐 개성부의 유학(儒學)을 크게 진흥시켰다.

1487년 70세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오히려 형조참판에 중용되었다.

1490년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자(陞資)하면서 행첨지중추부사에 개수(改授), 이후 수지중추부사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순근(醇謹)하고 부지런하면서도 공평한 직무수행으로 칭송이 있었다.

시호는 공평(恭平)이다.

[참고문헌]

端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한충희(韓忠熙)
대표명김영유(金永濡)
영유(永濡)
성명김영유(金永濡)
시호공평(恭平)

명 : "영유(永濡)"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