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거제 성립과 법제적 추이
2. 과거의 응시자격
3. 과거의 종류
4, 과거 시험 절차

우리나라의 최초 시험제도는 통일 신라시기인 788년(원성왕 4) 실시된 독서삼품과이다. 독서삼품과는 유학적 소양을 시험하여 관료를 임용하는 제도였다. 객관적인 시험을 통해서 인재를 선발하여 관료화하는 독서삼품과는 폐쇄된 신분제인 골품제 위에서 실시되었기 때문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과거제는 나말·여초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골품제가 무너지고, 관료제로 전환되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고려의 과거제가 처음 실시된 것은 956년(광종 9) 중국 후주인(後周人) 쌍기(雙冀)의 건의에 의한 것이다. 광종은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해가는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과거제를 채택하였다. 중국의 후주는 무장 출신이 황제가 되던 시기에 문신인 곽위(郭威)를 황제로 추대하고,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 정치를 수행하였다. 고려 광종 역시 무인 출신인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기 때문에 후주의 개혁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후주의 개혁 정치를 본보기로 삼아 노비안검법과 광군(光軍) 설치 그리고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는 광종의 개혁 정치를 도와 수행한 주요 인물로 956년(광종 9)·958년(광종 11)·959년(광종 12) 3차례나 시관인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과거제를 통한 신진 관료의 진출에 대해 공신 출신 호족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힌 광종은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통해 호족 세력을 정리하고, 신라 6두품 계열·후백제 계통·발해 계통 인물 등 신진 관료를 등용하였다. 1)
광종 개혁 정치의 성공으로 성종대에는 교육과 과거제가 유기적으로 발전되어 갔다. 성종은 개경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경학박사를 파견하여 지방의 향리 자제를 교육시켰다. 특히 지방에 파견된 경학박사는 자신이 가르친 이들의 과거 합격이 주요 임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국가에서는 교육과 과거제를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중앙의 관인 자제뿐만 아니라 지방의 향리 자제를 관료화하려고 하였다.
성종대 과거 출신 관료가 주요 관직에 진출하자 점차 과거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갔다. 이처럼 과거가 관료 선발의 주요 통로로 자리 잡게 되면서 과거제에 대한 제도적 정비도 이루어졌다. 1024년(현종 15) 현종은 지방의 과거 응시생들에 대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지방의 과거 응시생(鄕貢이라 일컬음)은 우선 지방관인 계수관이 주관하는 계수관시에 합격해야 했다. 계수관시의 합격 인원은 주현(州縣)의 규모에 따라 달랐다. 계수관시의 합격 정원은 1000정(丁) 이상의 주현에서는 3명, 500정(丁) 이상의 주현에서는 2명, 그 이하 주현에서는 1명이었다. 이것은 고려 초기 지방의 호족들에 의해 추천된 이들(향공이라고 함)이 개경에 와서 과거에 응시하던 것을 체계화한 것이다. 즉 지방의 토호 세력인 호족들이 추천하던 것을 그 권한을 계수관에게 주되, 객관적으로 추천할 수 있도록 시험제도를 도입하였다. 계수관은 시험에서 선발된 이들을 추천하고, 이들이 개경의 과거 시험에 응시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수관이 과거 응시에 합당치 못한 인물을 선발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국자감시를 주관하는 국자감에서 계수관을 조사하여 처벌할 수 있었다. 2) 1110년(예종 5)에 서경의 경우에는 유수관이 시험을 실시하여 국가감시에 응시할 대상자를 선발하게 하는 유수관시가 따로 실시되었다. 3)
계수관시·유수관시를 합격한 이들은 개경의 국자감에서 다시 시험을 치러야 했다. 국자감에서 치룬 국자감시에 합격해야 예부에서 주관하는 본시험에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계수관시·유수관시의 설행은 첫째 관료가 되려는 지방의 과거 응시생에게 부담을 줌으로써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려 한 것이다. 둘째 국자감이 지방에서 과거를 시행하는 계수관을 통제하게 하여 중앙교육기관의 권한을 확대하여 과거 실시를 체계화하려 한 것이다. 4)
계수관시나 유수관시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 개경시가 고려 후기에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개경시는 개경 거주자에게 응시 자격이 주어지는 시험이다. 개경 거주자란 국학생이나 십이도생(十二徒生)을 제외한 이들로서 과거에 응시하려는 이들을 말한다. 개경시에 응시하는 이들은 주로 관직자들이 많았다. 5)
1031년(덕종 즉위년)에 본시험인 예부시에 앞서 예비 시험인 국자감시 6)를 설행하였다. 1031년 설치된 국자감시는 현종대에 지방의 과거 응시생이 계수관시를 거쳐 국자감에서 시행한 시험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덕종이 설치한 국자감시는 지방의 응시생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개경의 응시생들도 그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개경의 응시생이란 국학생, 사립학교 학생인 십이도생(十二徒生) 등이다. 덕종이 설치한 예비 시험은 국자감시는 본시험인 예부시를 응시하고자 하는 원하는 이들이 시험을 치렀다. 따라서 덕종대부터는 과거 시험이 예비 시험과 본시험이라는 이중적인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국자감 시험은 3품 이하의 관원이 시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국자감시의 합격 정원은 제한이 없었다. 「고려사」 선거지에 의하면 적게는 39명에서 많게는 100명 이상이 선발되었다. 국자감시에 합격한 이들은 국자감에서 수학하였다. 이들이 국자감에서 3년을 수학하여야 본 시험인 예부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본시험인 예부시는 고려 과거의 근간을 이루는 시험이다. 예비 시험이 시행되기 전에는 예부에서 치루는 이 시험으로 과거 합격자가 결정되었다. 예부시는 1회 혹은 2회의 시험을 통해서 합격자를 결정하였다. 2회의 시험을 치렀다는 것은 복시(覆試)의 설행을 의미한다. 覆試는 인종 초기에 폐지되기 전까지 간헐적으로 시행되었다. 복시를 시행한 왕은 성종·현종·문종·선종·숙종·예종이었지만, 복시 시행 횟수가 과거 시행 횟수와 일치되지는 않았다. 즉 복시를 시행한 왕들도 과거를 시행할 때마다 복시를 치룬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7)
복시는 시관인 지공거가 주관하여 과거 합격자를 배출한 이후 왕이 개입하여 시험을 행하여 합격자를 선발하는 것을 말하는데, 시행 절차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1116년(예종 11) 예종이 복시를 시행하였는데, 지공거와 동지공거가 선발한 과거 합격자와 그 이외의 인원을 더 모아 복시를 시행하고 급제 증서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과거 합격자와 이외의 인원을 더 모아 시험하였다고 한다. 복시가 항상 과거 급제자와 그 이외의 사람을 대상으로 치렀는지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관인 지공거가 선발한 합격자를 왕이 복시를 통해서 다시 선발한다는 것은 지공거의 독단을 막고, 왕의 권위를 행사한 것이다. 복시가 인종대에 폐지된 후 다시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후기 충렬왕대에 와서이다. 8)
예부시의 정원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광종대에서 성종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10명 이내의 합격자가 배출되고, 그 이후에는 10명 이상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다. 고려 후기에 들어 신종대 이후로 을과 3명, 병과 7명, 동진사 23명 등 33명의 합격자가 배출되기 시작하였으나,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1288년(충렬왕 14) 이후로는 몇 번의 예외도 있으나, 규칙적으로 33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9)
고려의 과거제는 고려 후기에 크게 개혁되었다.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왕정으로 회복되자, 문신들은 학교제도와 과거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주자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 계층에서는 국학을 진흥시키는데 주력하여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개칭하여 중건하였다. 성균관에서는 오경과 주례로 육재(六齋)를 구성하였던 것을 사서와 오경으로 구재(九齋)로 바꾸었다. 이것은 사장(詞章) 중심의 교육에서 경전 중심 교육으로 전환된 것을 의미한다. 성균관에서는 교수법에도 개혁이 진행되어 경서를 전공별로 나누어 강의와 토론을 병행하였다. 이처럼 교육제도와 학풍이 새로워지자 그 영향이 과거제에도 미치게 되었다. 시험 과목이 시부(詩賦)에서 경학(經學)으로 바뀌게 되었고, 시험 제도에 있어서도 원의 과거제에 따라 삼층법이 시행되었다.
과거삼층법은 1369년(공민왕 18)에 처음 시행되었는데, 향시·회시·전시의 삼단계의 시험을 치루는 것이다. 지방에서 향시에 응시하여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회시가 치러졌다. 회시 합격자는 최종적으로 전시를 치르는데, 전시는 왕이 시험을 주관하였다. 과거 삼층법은 시관인 지공거가 과거를 주관하던 것을 왕이 과거에 개입함으로써, 지공거의 영향력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고려에는 지공거를 좌주(座主)로 삼고, 그 해 지공거에 의해서 선발된 합격자를 문생(門生)이라 하는 좌주문생제가 발전하였다. 좌주문생는 과거의 문벌을 형성하는 폐단을 초래하였다. 왕들은 좌주문생제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친시(親試)를 시행하여 스스로 좌주를 자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친시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졌고, 제도화되지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삼층법이 시행됨으로써 전시를 통해서 왕이 최종 합격자를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창왕이 즉위한 해인 1388년에는 시관에 대한 변화가 있었다. 시관은 대체로 지공거와 동지공거 2명으로 구성되어 있던 것을 8명으로 늘렸다. 8명의 시관은 회시 시관(지공거)과 전시 시관으로 나뉘었는데, 이러한 조처는 좌주의 권한을 분산시키려 한 것이다. 고려 초기 시관의 중임이 이루어지면서 문벌과 학벌을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시관인 좌주와 시관이 선발한 합격자 문생 사이에는 부자 관계와 같은 긴밀한 유대가 이루어졌다. 과거 합격자가 발표된 이후 좌주가 문생들과 함께 며칠 동안 연회를 베풀었다.
창왕 즉위년에 시관의 수를 증원시킴으로써 좌주와 문생이 함께하는 연회 역시 없었을 것이며, 이것은 좌주와 문생간의 강한 유대 의식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고려 말기 주자학을 수용한 이후 관학이 쇄신되고, 과거제의 폐단을 줄이는 개혁은 조선의 과거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 이성무, 『조선의 과거제도』, 집문당, 1994, 37~42쪽.
2)『고려사』 권73, 선거 1, 과목1, 현종 15년 12월판(判).
3) 『고려사』권73, 선거 1, 과목1, 예종 5년 9월판(判).
4) 허흥식, 『고려의 과거제도』, 일조각, 2005, 47쪽.
5)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 연구』, 일지사, 1990, 186~187쪽.
6) 국자감시는 진사시(進士試)·남성시(南省試)·사마시(司馬試)·거자시(擧子試)·거자과(擧子科)·남궁시(南宮試)·백자과(百字科)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7) 허흥식, 앞의 책, 59쪽 <표 4> 고려 전기 복시의 시행 참조.
8) 허흥식, 앞의 책, 앞의 책, 59~60쪽.
9) 허흥식, 앞의 책, 59쪽 앞의 책 271~275쪽.

고려 초기에는 과거의 응시자격에 대한 법 규정이 확인되지 않는다. 과거의 응시 자격은 과거의 종류와 시험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획일적으로 언급하기는 어렵다. 여기서는 계수관시10)·국자감시·예부시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계수관시의 응시 자격에 대한 언급은 1048년(문종 2)에 보인다. 제술업·명경업의 계수관시에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은 각 주현의 부호장 이상의 손자와 부호정 이상의 아들로 한정하였다. 의업은 학습을 광범위하게 할 필요가 있어서 부호정 이상의 아들로 한정되지 않고, 서인이라도 응시하게 하였다.11) 1048년의 이러한 조처는 계수관시가 현종대부터 설행되자 지방의 응시자 수가 증가하면서 응시자에 대한 규제가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국자감시의 응시자격은 계수관시 합격자(鄕貢), 중앙의 교육기관에서 수학중인 국자감생, 십이공도생(十二徒生) 등이다. 제술업·명경업 계수관시 응시 대상자가 지방의 상층 향리 자제였다. 중앙의 교육 기관에서 수학하는 학생의 신분을 보면, 최소한 7품 이상 관료의 자제이다. 국자감·태학·사문학 입학 자격은 조부와 부의 관품에 따라 주어졌다. 국자감 학생은 문무관 3품 이상의 자손 및 훈관 2품으로서 현공(縣公) 이상의 직위를 가진 자와 또 경관(京官) 4품으로서 3품 이상의 훈봉(勳封)을 받은 자의 아들로 하였다. 태학생은 문무관 5품 이상의 아들 손자와 또는 정(正) 종(從) 3품관의 증손 및 훈관(勳官) 3품 이상의 봉작이 있는 자의 아들로 하였다. 사문학(四門學) 학생은 훈관 3품 이상 봉작이 없는 자와 4품으로서 봉작이 있는 자 및 문무관 7품 이상의 아들로 제한하였다.12) 그러므로 국자감시의 응시자들은 7품 이상의 중앙 관료 자제이거나 지방의 상층 향리 자제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잡업의 응시 자격 조건은 조금 다르다. 계수관에서는 향리 자제뿐만 아니라 서인까지도 응시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서인들도 국자감시에 응시가 가능하였다.
예부시 응시자격은 국자감시에 합격한 부류, 국자감시에 합격하지는 않았지만, 예부시에 응시 자격이 주어진 학생 그리고 관직자 등이다. 이렇게 보면 예부시 응시 자격은 국자감시에 합격한 부류와 국자감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예부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부류로 나뉜다. 국자감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예부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학생은 국자감생으로 고예시(考藝試)에서, 십이도생은 구재삭시(九齋朔試)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경우나, 승보시에 합격한 경우에 장려책의 일환으로 예부 시험에 바로 응시하도록 한 경우이다.13)
예부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부류는 관직자이다. 예부시에 응시할 수 있는 관직자는 권무관에서 7품 관원까지이다. 관직의 종류는 동정직, 전·현직 관원을 포함한다. 7품까지 한정된 것은 조관(朝官)인 6품 이상의 관료는 과거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의식에서이다. 그러나 본인이 원하는 경우에는 5~6품이라도 응시가 허락되었다.
관직자의 과거 응시가 허락되는 것은 고려 과거제의 특징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관직자가 과거에 응시한다는 것은 음서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한 후에 다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말한다. 즉 관직자의 과거 응시 허용은 음직 제수가 가능한 양반 귀족층에 대한 배려이다. 양반 귀족층이 음직을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과거를 통해 문한직과 같은 주요 관직에 제수된다는 것은 결국 양반 귀족층 내에서 관직자를 재상산하여 그들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게 한 것이다.
10) 여기서 계수관시란 계수관시뿐만 아니라 성격이 유사한 유수관시와 개경시를 포함하여 지칭하도록 하겠다.
11)『고려사』 권73, 선거 1, 과목1, 문종 2년 10월 판(判.)
12)『고려사』 권74, 학교.
13)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 연구』, 일지사, 1990, 218쪽.

1) 제술업
고려에서 시행된 과거의 종류는 제술업·명경업·잡업 등 세 계통으로 분류되어 있다. 제술업은 고려의 과거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시험이다. 제술업은 일명 진사과라고도 하고, 제술업 합격자를 진사라고 칭한다. 14)
제술업의 시험 과목은 계수관시에서는 시가 부과되어 오언육운시(五言六韻詩)를 제술하였다. 국자감시에서는 부(賦)나 육운시(六韻詩) 혹은 십운시(十韻詩)에서 선택하여 제술하게 하였다. 예부 시험에서는 예경(禮經)·육경의(六經義)·사서의(四書疑)등 경학과 시·부 등 문예, 논(論)·책(策) 등 시무에 대한 과목을 선택적으로 부과하였다. 예부시험은 초장·중장·종장으로 시험을 치르는데, 초장·중장·종장에 순차적으로 모두 합격하여야 예부 시험의 합격자가 될 수 있었다.
제술업 합격자의 등급은 갑과·을과 혹은 갑과·병과 등으로 이분하거나, 갑과·을과·동진사 혹은 갑과·병과·동진사 등으로 삼분하였다. 각 등급의 정원은 일정하지 않았다. 신종대에 와서는 을과 3명, 병과 7명, 동진사 23명 등 33명으로 합격 정원이 정해졌으나, 33인의 합격 정원을 지켜 합격자를 선발하게 된 것은 충렬왕대이다.
제술업 시험 설행 시기는 봄에 시험을 치르고 가을이나 겨울에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1004년(목종 7) 시험 시기를 3월로 정하고, 가을이나 겨울로 미루던 합격자 발표를 시험이 끝난 후에 바로 하도록 하였다.
제술업은 958년(광종 9)부터 공양왕 4년(1392)까지 약 250회가 설행되었고, 총 급제자는 6,330명이다. 제술업 급제자들은 경관직과 외관직에 제수될 수 있었다. 제술업 합격자가 제수받는 경관직은 권무(權務)·9품·8품의 한림원·예문관 등의 문한직이나 국자감의 학관직을 받는 경우와 권무(權務)·9품·8품의 경관 관사 일반직 등을 받는 경우가 있다. 외관직은 군현의 사록·서기·판관·현위(縣尉)·진부장(鎭副將) 등이 제수되었다. 제술업 급제자들은 외관직보다는 품계가 낮더라도 경관직에 제수되는 것을 더 선호하였다. 경관직은 시기에 따라 제수되는 관사에 차이가 있다. 무신정권기에는 주로 경관 일반직에 제수되는 사례가 많았으나, 충렬왕 이후로는 문한·학관직의 제수가 압도적이었다. 고려 초기에는 제술업에 합격되면 바로 관직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문종대 이후로는 1년~5년 정도 기다려야 초직에 제수되었다. 15)
2) 명경업
명경업은 제술업과 마찬가지로 956년(광종 9)부터 시행되었다. 명경업의 시험 체계도 계수관시-국자감시-예부 시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제술업 합격자를 진사라 하였으나, 명경업 합격자는 명경이라고 하였다. 명경업의 시험 과목은 「주역」·「상서」·「모시」·「예기」·「춘추」 등 5경이었다. 시험방법은 첩경(貼經)과 강독(講讀)이 있었다. 첩경은 앞뒤의 글을 가리고 1행만 보여주는데, 그 중 3글자만 첩지(貼紙)로 가려서 그 3글자를 알아맞히는 시험이다. 강독은 일정 대목의 경전을 읽고 구두(句讀)와 해석이 정확한가를 시험하는 방법이다. 두 시험 방법 가운데 첩경을 이틀 동안 먼저 치르고 다음에 강독 시험을 치렀다. 명경업은 계수관시에서는 각 1궤(机)씩 부과하고, 국자감시에서는 9궤~12궤를 부과하였다. 예부시험에서는 「상서」 전공자와 「주역」 전공자를 나누고, 전공에 따라 과목을 삼장(三場)으로 나누어 시험하였다. 명경업 급제자의 등급은 이과(二科)·삼과(三科)로 표시되었다. 명경업 합격자 등급인 이과와 삼과는 합격 성적에 다른 구분인지, 아니면 전공 구분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또한 합격 정원 역시도 확인되지 않는다. 시험 시기는 초기에는 제술업과 같은 시기에 시험을 치렀으나, 1004년(목종 7) 제술업보다 빨리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 발표는 제술업과 같이 행하도록 하였다. 명경업은 제술업이 설행되는 전해 11월에 시험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명경업은 제술업과 같이 설행되었기 때문에 958년(광종 9)부터 공양왕 4년(1392)까지 약 250회가 설행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명경업 합격자를 낸 시험은 139회만 확인된다. 139회의 명경업 시험을 통해서 458명의 합격자를 내었다. 명경업 합격자는 경관직으로 경관 관사의 일반직에 제수되는 경우, 문한직으로는 비서성 관직 그리고 학관직에 제수되는 경우가 있다. 문한직의 경우 제술업 합격자가 제수되었던 관직과 비교하면, 한림원이나 춘추관의 관직에는 제수되지 못하였다.16) 이러한 경향은 명경업은 사장보다는 경학을 주로 시험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3) 잡업
잡업도 958년(광종 9)부터 설행되었다. 이때 설행된 전공은 의업· 복업(卜業) 두 가지에 한정되었으나, 나중에 지리업(地理業)· 율업(律業)· 서업(書業)· 산업(算業)· 삼례업(三禮業)· 삼전업(三傳業)· 하론업(何論業) 등 9가지 전공으로 늘어났다. 고려시대에는 잡업도 국자감에서 교육하였다는 것과 유교과목인 삼례· 삼전· 하론이 잡업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조선시대 잡과와는 다른 특징적인 측면이다.
잡업의 시험 체계는 제술업· 명경업과 같이 계수관시-국자감시-예부시험으로 되어 있다. 잡업의 전공이 다양하여서 두 차례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율업· 산업· 서업· 의업· 복업· 지리업 등은 명경업과 동시에 실시되었고, 삼례업· 삼전업· 하론업은 위의 시험이 끝난 다음 실시되었다. 잡업도 초장· 중장· 종장의 3단계로 구분해서 부과하였다. 시험 방법은 초장과 중장은 대체로 첩경으로 하였으며, 종장은 독경(讀經)· 파문(破文)· 의리(義理)를 시험하였는데, 과업에 따라서는 실시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하론업은 상소문· 장계 및 기타 왕에게 글월을 정자로 쓰는 진서주장소첩(眞書奏狀小貼)과 긱산(喫算)이다. 시험 과목은 과업에서 익혀야 하는 전문서적이다. 시목과목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17)
<표 1> 잡업의 시험과목
의업 『소문경(素文經)』·『갑을경(甲乙經)』·『본초경(本草經)』·『명당경(明堂經)』·『맥경(脉經)』·『 침경(針經)』·『난경(難經)』·『구경(灸經)』
복업
지리업 『신집지리경(新集地理經)』·『유씨경(劉氏經)』·『지리결경(地理決經)』·『경위령(經緯令)』·『 지경경(地鏡經)』·『구시경(臼示經)』·『태장경(台藏經)』·『소씨서(蕭氏書)』
율업 율(律)·령(令)
서업 『설문(說文)』·『오경자양(五經字樣)』·『서품장구시(書品長句詩)』·『해서(眞書)』·『행서(行書)』·『전서 (篆書)』·『인문(印文)』
산업 『구장(九章)』·『철술(綴術)』·『삼개(三開)』·『사가(謝家)』
삼례업 『예기』·『주례』·『의례』
삼전업 『좌전』·『공양전』·『곡량전』
하론업 『하론(河論)』·『효경(孝經)』·『곡례(曲禮)』
잡업 합격자 등급은 명경업과 마찬가지로 과업명을 앞에 붙이고 등급을 표시하였다. 예를 들면 '의업이과3인'으로 표시하였다. 잡업은 제술업·명경업과 같이 설행되었으므로 설행 횟수가 같을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으로는 설행 횟수를 확인할 수 없다. 또한 합격 인원도 분명하지 않다. 잡업 합격자는 대부분 해당 전공이 필요한 관사의 이속(吏屬)과 하급 관원으로 진출하였다.18)
14) 제술업 합격자를 진사라고 하는 것은 국자감시 합격자를 진사라고 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15) 박용운, 앞의 책, 322~323쪽.
16) 박용운, 앞의 책, 592~593쪽.
17) 『고려사』권73, 선거 1, 과목1, 선종 1년 11월 판(判.)
      『고려사』권73, 선거 1, 과목1, 인종 14년 11월 판(判.)
18) 박용운, 앞의 책, 624쪽.

고려 초기 과거 시험은 규칙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 1084년(선종 원년)에 3년에 1회씩 설행한다고 정하였으나, 이것은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고려사』 선거지에 의하면, 과거가 매년 혹은 2~3년 간격으로 설행되고 있다.
고려 초기에는 과거 시험이 주로 3월에 실시되고, 가을이나 겨울에 합격자를 발표하여 응시자들이 합격 여부를 확인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1004년(목종 7)에는 과거법을 수정하였다. 명경업과 잡업은 제술업이 설행되기 전 해 겨울 11월에 시험이 설행되었고, 제술업은 3월에 시험을 설행하였다. 제술업 시험 설행 후 10일 만에 등급을 정하여 합격자를 발표하였는데, 이때 명경업과 잡업의 합격자도 같이 발표하였다.
그렇다면 과거 응시자가 시험을 치르는 절차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시험 절차에 관한 자세한 자료는 없으나 『고려사』 선거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응시자는 행권(行卷)과 가장(家狀)을 시험관리소인 공원(貢院)에 제출해야 한다. 행권은 응시자 이름, 생년, 사조(四祖: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를 적은 원서이며, 가장은 행권에 적은 세계(世系)를 증명하는 증빙서류이다. 행권과 가장은 제술업의 경우 12월 20일까지, 명경업· 잡업은 11월을 기한으로 제출되어야 했다. 다만 관직자나 부모의 상이 시험기일 직전에 끝난 경우에는 서류를 접수하는 기일이 지나더라도 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부모상을 당한 경우에는 27개월이 지나야 응시가 가능하였다. 부모상의 기한에 대한 검토는 중앙은 부(部)· 방(坊)· 리(里)의 책임자, 지방은 그 고장 기인(其人)이나 사심관(事審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응시자들은 시험지를 시험이 설행되기 며칠 전에 공원에 제출해야 한다. 시험지에는 첫머리에 이름, 본관, 사조(四祖)를 기록하고, 그 부분을 풀로 봉하여 제출하여야 한다. 이것은 시관이 시험 등급을 공정하게 매기게 하기 위한 것이다. 시관인 지공거는 문하부와 말직사에서, 동지공거는 경(卿)· 감(監)이 선출한다. 선출된 시관은 시험 전날 오후에 초장· 중장· 종장의 시험을 적어서 왕에게 올리면, 왕이 시험 문제를 낙점하여 정하였다. 시관은 왕이 낙점한 시험 문제를 공원에 가져가 시험 당일 내걸게 된다.
시험 당일 왕의 비서인 승선(承宣)이 어보를 가져오는데, 이 어보는 시험지에 도장을 찍는데 사용되었다. 시험이 끝난 후 시관이 등급을 매기면 승선이 발표하는데, 발표 절차의 초장과 중장은 같다. 최종 시험인 종장의 합격자는 시관이 등급을 매겨 왕에게 바치면, 왕이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최종 합격자가 발표되면, 합격자들은 시관인 좌주를 찾아가 예를 행하고, 좌주는 이들을 자기 집에서 맞아 연회를 베풀었다. 또한 최종 합격자에게는 홍패가 하사되었다.
홍패는 원칙적으로 사령이 합격자의 집에 가서 하사하였다. 사령이 홍패를 가져오면, 합격자의 집에서는 사령을 대접하는 행사가 있었다. 홍패를 하사하는 사령을 대접 하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궁궐에서 직접 홍패를 하사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홍패를 합격자의 집에 가서 하사하는 것은 합격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 동리에도 영광스럽게 하여 학업을 닦고자 하는 의욕을 북돋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서 계속 합격자의 집에 홍패사령이 파견되었다. 19)
과거 합격자 명단을 계적(桂籍)이라고 하고, 같은 해 과거 합격자 명단을 모아놓은 것을 『동년록』이라 한다. 『동년록』은 국가에서 만들어서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가에서 동년록을 모아서 정리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현존하는 고려시대 『동년록』은 극히 적다.20)
현존하는 『동년록』은 조선시대 『국조문과방목』의 부록으로 ‘전조과거사적(前朝科擧事績)’이란 이름으로 붙어 있는데, 고려 후기 동년록 일부만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 이외에도 『고려열조등과록』, 『해동방목』이 있다.
『전조과거사적』에는 동년록이 16개가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동년록』은 1290년(충렬왕 16)방, 1360년(공민왕 9)방, 1362년(공민왕 11)방, 1368년(공민왕 17) 송산친시방, 1369년(공민왕 18)방, 1371년(공민왕 20)방, 1374년(공민왕 23)방, 1376년(우왕 2)방, 1377년(우왕 3)방, 1380년(우왕 6)방, 1382년(우왕 8)방, 1383년(우왕 9)방, 1385년(우왕 11)방, 1388년(우왕 14)방, 1389년(공양왕 1)방, 1390년(공양왕 2)방 등 16개이다. 동년록의 수록 내용은 전력, 이름, 생년, 본관 그리고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의 직역과 이름이다. 외조부의 경우에는 직역과 이름 이외에 본관까지도 기재되어 있다.21)
19) 빅용운, 앞의 책 627~628쪽.
20) 허흥식, 『고려과거제도사 연구』, 일조각, 1981, 240~241쪽
21) 『국조문과방목』, 태학사,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