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임치정(林蚩正)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84CE58C815D1932X0
호(號)춘곡(春谷)
생년?(미상)
졸년1932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임국로(林國老)
출신지평안남도 용강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임치정(林蚩正)
미상∼1932년. 독립운동가. 호는 춘곡(春谷). 평안남도 용강 출신. 이조판서 임국로(林國老)의 아들이다.

1904년 미국에 건너가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교포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여 간사로 활동하는 동시에 그 기관지인 『공립신보(共立新報)』를 간행하였으며, 하와이 교포들이 1903년에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에도 가입하였다.

1907년 겨울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서 회계사무를 맡아보았다.

1907년에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일제가 애국인사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조작한 ‘양기탁 등 보안법위반사건’과 ‘105인사건’ 이른바 ‘데라우치(寺內正毅)총독모살미수사건’에 연루, 1911년 일본경찰에 잡혔다.

혹독한 고문 끝에 주모자 6인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1912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7월 2심인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14년 특사로 석방되어 진남포에서 광무소를 경영하며 광산개발을 지도하였다.

1919년 이승훈 등 기독교계 인사들과 더불어 3‧1운동을 계획, 준비하고, 평안도일대에서 시위를 조직하는 데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특히 자신의 거주지인 진남포에서는 같은 감리교회 간부인 노윤길(盧允吉)홍기황김정민(金正民)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하여 3월 1일 시위를 일으키는 데 앞장섰다.

1923년 민족교육기관의 설립을 목표로 결성된 민립대학기성회의 감사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독립운동사자료집 1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新民會의 創建과 그 國權恢復運動 上‧下(愼鏞廈, 韓國學報 8‧9, 1977)

[집필자]

이윤상(李潤相)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