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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복(李昇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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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95(고종 32)
졸년1978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충청남도 예산
공훈건국포장

[상세내용]

이승복(李昇馥)
1895년(고종 32)∼1978년.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예산 출신.

1913년부터 1919년까지 노령(露領)북만주 지방에서 이동녕(李東寧)이회령(李會寧)이시영(李始榮)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0년 노령에서 박은식(朴殷植)과 같이 『청구신문(靑丘新聞)』을 발행하였는데, 신문활자를 운반하다가 경성헌병사령부에 잡혀 6개월간 구금되기도 하였다.

192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시영조완구(趙琬九)조소앙(趙素昻)과 연통제 국내조직 건설문제를 협의하였다.

1923년 7월 서울에서 홍명희(洪命熹)구연흠(具然欽)박일병(朴一秉)김재봉(金在鳳)원우관(元友觀) 등과 사회주의운동단체인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를 조직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앞서 1923년 1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종로에서 포위한 경찰 수명을 사살하고 자신도 순국한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의 의거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투옥되었다.

1926년 조직된 사회주의운동단체인 정우회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민족주의세력 일부가 변절하여 자치운동을 전개하는 등 독립운동전선에 혼란을 일으키자, 1927년 2월 자치론에 반대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세력과 합작하여 신간회(新幹會)를 발기, 창립하였다.

창립대회에서 간사로 피선된 데 이어 같은달 21일 열린 총간사회에서 본부 선전부 책임자로 피선되어 핵심적인 위치에서 신간회를 이끌면서 지방조직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1927∼1931년 동아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만보산사건 필화로 안재홍(安在鴻)과 함께 투옥,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계속 안재홍과 같이 독립운동을 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東亞日報
白凡逸志
韓國共産主義運動史 2‧3(金俊燁‧金昌順,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69‧1973)
思想事件起訴狀決定判決寫綴(京城地方法院檢事局, 1932)
朝鮮民族獨立運動秘史(坪江汕二, 巖南堂書店, 1959)

[집필자]

강진갑(康鎭甲)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