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철(金澈)

[요약정보]

UCIG002+AKS-KHF_12AE40CCA0FFFFB1886X0
생년1886(고종 23)
졸년1934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전라남도 영광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김철(金澈)
1886년(고종 23)∼1934년. 독립운동가. 전라남도 영광 출신.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국내로부터 동지 선우 혁(鮮于爀)서병호(徐丙浩)현순(玄楯) 등과 같이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제1회임시의정원회의에서 전라도의원에 선임되었고, 제2회 회의에서는 임시정부 재무부 겸 법무부위원이 되었다. 같은해 8월에 임시정부 교통부차장에 임명되었는데, 총장 문창범(文昌範)이 취임하지 않아 총장직까지 겸하게 되었다. 동시에 신한청년당 부주무(副主務)로서 기관지 『신한청년』을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도 역임하였다.

1920년 1월에 김구(金九) 등과 같이 의용단(義勇團)을 발기,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1922년 7월에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회원으로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진력하였다.

1924년 5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임명되었다.

1932년 1월 상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정치위원으로 선출되고, 같은해 11월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1933년 7월 임시의정원의원에 선임되어 자격심사위원으로 신도의원의 자격을 심사하였다.

1934년 다시 국무위원에 선임되었고 국무원비서장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이동에 따라 각지를 전전하면서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한때 김구와 맞선 조소앙(趙素昻)과 제휴하였다. 한국독립당의 14인 이사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한 바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3‧1獨立運動과 臨時政府의 法統性(李炫熙, 東方圖書, 1983)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