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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李光){2}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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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성암(星巖)
생년1879(고종 16)
졸년1966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충청북도 청주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이광(李光)
1879년(고종 16)∼1966년.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성암(星巖). 충청북도 청주 출신.

1894년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에 입학하였으며,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였다.

1905년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서울 상동(尙洞)의 공옥학교(攻玉學校)교사로 취임하여 청소년교육에 노력하는 한편, 1907년 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양기탁(梁起鐸)이회영(李會榮) 등이 주도하는 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주권수호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주권이 강탈당하자 공옥학교를 사직하고 만주로 망명, 이시영(李始榮)과 같이 교민의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할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여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 일대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다.

1912년 중국 상해에 가서 신규식(申圭植)이 주도하는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으며, 난징(南京)의 민국대학(民國大學)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부수립에 진력하였고, 1921년 임시정부 외무부의 북경주재외무위원으로 임명되어 한중양국의 외교연락업무를 담당하였다.

1932년 난징에서 각 단체연합체인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고, 1938년에는 임시정부의 후난성(湖南省) 외교연락대표로 활동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임시정부 화북선무단장(華北宣撫團長)으로 화북지방 재류교포의 귀국사무를 맡아보다가, 그뒤 귀국하여 충청북도지사‧감찰위원회위원장‧체신부장관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독립운동사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이미지]

[집필자]

신재홍(申載洪)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