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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봉(朴勝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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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산농(汕農)
생년1871(고종 8)
졸년1933
시대조선후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관료
5대조박윤원(朴胤源)

[상세내용]

박승봉(朴勝鳳)
1871년∼1933년. 조선 말기의 개화파 인사.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호는 산농(汕農)이다.

순조의 외가 직계자손이며 유학의 거장인 박윤원(朴胤源)의 종5대손이고, 박정양(朴定陽)박영효(朴泳孝)와도 친척지간이 되는 명문 가문의 출신이다.

1895년 미국방문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4년 동안 외교관생활을 하면서 서구문명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았으며, 귀국 후 궁내부협판으로 있으면서 개화인사들과 함께 조선의 개화를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1907년 이준(李儁) 열사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석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일 때문에 평안도관찰사로 좌천되었는데, 이때 이승훈(李昇薰)을 알게 되어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에 큰 기여를 하였고 이상재(李商在)와도 교분을 나누게 되었다.

이 무렵 독립협회 회원들이 3년간의 옥고생활을 마치고 출감하면서 옥중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기독교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기독교를 통한 민족운동을 펴나가고 있었는데, 그들과 밀접한 친분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연동교회에 참석하였다.

1909년 유성준(兪星濬)이여한(李汝漢)황기연(黃碁淵) 등과 함께 안동교회(安洞敎會)를 설립하여 초대장로로 장립되었다. 이 교회는 그의 영향을 받은 양반들의 대규모 입교로 인하여 ‘양반교회’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육영사업에도 뜻을 두어 1908년에는 중앙고등학교 전신인 기호학교(畿湖學校)를 설립하였으며, YMCA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1913년에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이사로 선출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 배후에서 온갖 도움을 다 제공해주었으며 상해임시정부에의 자금조달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문서운동에도 가담하여 1921년 윤치호(尹致昊)이상재이승훈 등 유력한 기독교 인사들과 같이 광문사(廣文社)를 창립하고, 1923년에는 다시 조선기독교 창문사(彰文社)로 발전시켰다.

1922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교육자립을 추구하였으며 교회내의 내분으로 하교교회(河橋敎會)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예기(禮記)』를 기반으로 하여 기독교적 제사관을 정립하고자 노력하면서 조상제사에 관한 선교사들의 일방적 관점을 시정하려고 하였다.

[참고문헌]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上(車載明編, 新門路敎會, 1928)
安洞敎會略史(安洞敎會, 1959)
韓國基督敎史硏究(金良善, 基督敎文社, 1971)

[집필자]

김광수(金光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