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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진(權東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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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우당(憂堂)
호(號)실암(實菴)
생년1861(철종 12)
졸년1947
시대조선후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생지경기도 포천
공훈건국훈장 대통령장

[상세내용]

권동진(權東鎭)
1861년(철종 12)∼1947년. 독립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애당(愛堂)우당(憂堂). 천도교에 입교한 뒤의 도호(道號)는 실암(實菴).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9세에 조선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2년과정을 마치고 육군 초관으로 3년간 근무한 뒤, 함안군수를 1년간 역임하였다.

그뒤, 거문도첨사로 있을 때 명성황후시해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일본으로 망명하여 11년간 동경에 체류하였고, 귀국하여 다시 중추원부참의로 2개월간 있었다.

1906년 대한협회 부회장으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에서 사귀었던 손병희(孫秉熙)의 영향으로 천도교에 입교, 도사(道師)가 되었으며 전도에도 종사했다.

1918년 11월 일본 대판(大阪)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소개된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 14개조항을 읽고, 보다 구체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2월에 천도교측의 오세창(吳世昌)최린(崔麟) 등과 함께 최초로 독립운동을 발의하여 손병희와 상의하였다.

그들은 첫째, 독립운동의 대중화, 둘째 독립운동의 일원화, 셋째 독립운동의 비폭력화를 결정한 뒤, 이를 거족적으로 펴기 위하여 기독교‧불교‧유림 등 각종 종교단체를 망라하는 동시에, 당시의 저명인사들로 민족대표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1일 태화관(泰華館)의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천도교측 15인 중 1인으로 잡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천도교에서 발간하던 잡지 『개벽』의 편집진으로, 또한 신간회(新幹會)의 부회장으로 적극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3월에는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 자택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연합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하였고, 5월에는 공산당과 급진민족주의자들이 국민당을 조직하여 일대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일본경찰의 사전검거로 실패하였다. 당시 공산주의계 인물로 일본경찰의 주목 대상이었다.

그뒤, 특히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세력으로 신간회는 엄중한 경계 속에서 일대 시위운동과 대연설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먼저, 학생만세운동의 정체 폭로, 구금학생의 무조건 탈환, 경찰의 학원유린배격, 포학한 경찰정치 타도 등의 강연을 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연사로 권동진 이외에 허헌홍명희조병옥이관용 등을 내정하였으나, 또다시 사전에 탄로되어 서울 종로경찰서에 검거,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 뒤에는 신한민족당 당수와 민주의원 등을 역임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3‧1運動秘史(李炳憲, 1959)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3‧1運動과 天道敎界(朴賢緖, 3‧1運動50周年紀念論集, 東亞日報社, 1969)
光州抗日學生事件資料(朝鮮總督府警務局)

[이미지]

[집필자]

김진봉(金鎭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