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용환(羅龍煥)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098C6A9D658B1864X0 |
호(號) | 택암(澤菴) |
생년 | 1864(고종 1) |
졸년 | 1936 |
시대 | 조선후기 |
활동분야 | 호국 > 독립운동가 |
출신지 | 평안남도 성천 |
공훈 | 건국훈장대통령장 |
[상세내용]
나용환(羅龍煥)
1864년(고종 1)∼1936년. 독립운동가. 천도교인이자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호는 택암(澤菴). 평안남도 성천 출신.
23세 때 동학에 가담하여 나인협(羅仁協)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2월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그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달 27일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권병덕(權秉悳)‧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黙) 등의 동지와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서울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스스로 붙들리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3세 때 동학에 가담하여 나인협(羅仁協)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2월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그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달 27일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권병덕(權秉悳)‧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黙) 등의 동지와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서울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스스로 붙들리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三‧一運動秘史(李炳憲, 時事時報社, 1959)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34)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34)
[집필자]
김진봉(金鎭鳳)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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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