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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식(金貞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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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삼성(三省)
생년1862(철종 13)
졸년1937
시대조선후기
본관청풍(淸風)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황해도 해주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정식(金貞植)
1862년(철종 13)∼1937년. 독립운동가‧청년운동가. 본관은 청풍(淸風). 호는 삼성(三醒, 三省). 황해도 해주 출신.

독립협회 운동이 기세를 올릴 무렵 경무관(警務官)으로서 만민공동회에 가담하였으며, 상부에서 그 회원들을 잡아들이라 하였을 때, 체포를 지연 또는 피신시켰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지하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이상재(李商在) 등 독립협회 동지들과 함께 일본에 망명간 박영효(朴泳孝) 등 지도자들과 공모하여 정부전복을 음모하였다는 흉계에 걸려들어 1902년 6월 이상재유성준(兪星濬)홍재기(洪在箕)이원긍(李源兢)이승인(李承仁) 등과 함께 국사범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심령의 변화를 입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3년간의 옥살이 끝에 1904년 3월 석방되어 옥중동지들과 함께 연동교회에 입교하는 한편, 황성기독교청년회에 가입하였다. 교회 안에서는 교육협회 및 부용회(芙蓉會)라는 청소년운동체를 조직하였고,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초대 한인총무가 되어 서구식 교육과 체육운동 등을 개척하였다.

1906년 8월에는 일본 동경에 파송되어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를 창설하고, 초대총무가 되었다. 조만식(曺晩植)장혜순(張惠淳) 등 초창기 회원들과 함께 유학생을 보호, 지도하는 한편 1907년 제7회세계기독학생연맹세계대회가 동경에서 열렸을 때 윤치호(尹致昊)김규식(金奎植)민준호(閔濬鎬)김필수(金弼秀) 등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교회연합운동의 선봉을 서게 되었다.

한편 일본에서 조선기독교회(오늘날의 대한기독교회총회)를 조직했다.

즉, 1909년 제3회조선예수교장로회독로회가 평양에서 모였을 때 한국유학생들을 위한 교회창설을 건의한 결과, 목사 한석진(韓錫晉)을 파송받아 청년회회관에서 정식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 교회간부로 김정식을 비롯하여 조만식오순형(吳舜炯) 등 3인의 영수와 백남훈(白南薰)장혜순 등 4인의 집사가 있었다.

그뒤 이 교회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교회로 발전하여 2년마다 장로‧감리 두 교파 목사들이 번갈아 파송되었다. 그리고 우치무라(內村鑑三) 등 일본교계 지도자들과 교분이 두터워 무교회주의 신앙을 한국에 도입하는 데 큰 구실을 했으며, 신해영(申海永)과 손잡고 유학생단체인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육성에 힘썼다.

대한흥학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1909년에 해산되었으나 다시 이를 각 지방별 학생친목회로 재건하여 학우회(學友會)로 발전할 수 있게 함으로써 1919년 동경 기독교청년회회관에서 2‧8선언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였다.

1912년 105인사건 때에는 그 진상을 폭로하다가 1914년 총무직에서 쫓겨나 귀국하였다.

[참고문헌]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전택부, 정음사, 1968)

[집필자]

전택부(全澤鳧)
대표명김정식(金貞植)
성명김정식(金貞植)

성명 : "김정식(金貞植)"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加資錄金貞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