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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용(李允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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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중(景中)
생년1854(철종 5)
졸년1939
시대조선후기
본관우봉(牛峰)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호준(李鎬俊)
처부김기태(金箕台)
출신지평양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윤용(李允用)
1854년(철종 5)∼1939년. 조선 말기의 문신‧친일파.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경중(景中). 평양 출신. 이호준(李鎬俊)의 서자이며, 완용(完用)의 형이다.

1869년(고종 6) 돈녕부참봉이 되었고, 흥선대원군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그 사위가 되었으나 아내와의 사별 후 김기태(金箕台)의 딸과 재혼하였다.

1871년 사제(賜第)가 내렸고, 1881년에는 양덕현감에 제수되었다.

1884년 통정대부에 승임되는 한편, 전라병사로 전보되었다가 한성부좌윤을 거쳐 금군별장병조참판을 역임하고, 1887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이어 1889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이어 한성부판윤지의금부사를 거쳐 영변부사로 나갔다가 다음해에는 봉산군수로 전임되었다.

1891년에 다시 영변부사에 재임되었고, 1894년에는 형조판서로서 좌우포도대장을 겸직하기도 하였다. 이어 갑오개혁 이후 경무사(警務使)에 전임되었다가 1896년 이완용이범진(李範晉) 등과 모의하여 고종을 아관파천시키고 군부대신농상공부대신이 되었다.

이듬해 의정부찬정, 1903년 경상남도관찰사경상북도관찰사가 되었다.

1904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전임되었다가 전라남도관찰사로 전보되었으며, 그해 다시 군제의정관(軍制議政官)을 거쳐 군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찬모관(贊謀官)임시서리시종원경평리원재판장 등을 역임하였고, 1907년 궁내부대신이 되었으며, 그해 영친왕(英親王)일본에 유학하자 이에 배종하기도 하였다.

재임 동안 1등8괘장(一等八卦章)‧태극장을 비롯하여 대훈(大勳) 이화장(李花章)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공으로 일본국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각각 받았고, 또한 국권상실 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한편, 관직에 있으면서도 한성은행(漢城銀行)에 관여하여 1906년에는 부은행장에 취임하였고, 1909년에서 1923년까지는 은행장을 역임하는 등 재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참고문헌]

淸選考
韓國金融史硏究(高承濟, 一潮閣, 1970)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朝鮮總督府印刷局, 1910)
朝鮮總督府官報 32(1910)

[집필자]

이강칠(李康七)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