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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연(柳時淵)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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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유시연(柳時然)
자(字)박여(璞汝)
호(號)성남(星南)
생년1873(고종 10)
졸년1914
시대항일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호국 > 의병
출신지경상북도 안동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유시연(柳時淵)
1873년(고종 10)∼1914년.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일명 시연(時然). 자는 박여(璞汝), 호는 성남(星南). 경상북도 안동 출신.

1882년 향리의 대평학숙(大坪學塾)에서 유연각(柳淵覺)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다.

1896년 안동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의 막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어, 유선봉(柳先鋒)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안동의진이 깨어진 뒤 영남지방으로 남하한 김하락(金河洛)의진에 가담하였다.

1906년 봄 경주 분황사에서 열읍(列邑)의 의병대표들과 회맹하고 총대장에 추대되어 진보영덕평해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7년 한국군 강제해산 후 이강년(李康埏)이 격서를 보내와 함께 활약할 것을 요청하자, 군사 수십명을 거느리고 삼척방면으로 가서 이강년을 만났다.

이때 친일파 박두일(朴斗日)의 계략에 빠져 군졸들이 흩어지자, 격분하여 울진십이령(蔚珍十二嶺)에서 박두일을 사살하고 이어서 영양청송안동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 막하에 57명을 거느리고 의성 갈곡동에서 왜병을 습격하여 성과를 올리고 영양 북면에 잠복하였다.

1911년 8월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희(李象羲)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남북만주일대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에 최적지임을 깨닫고 그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1913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밀정의 밀고로 5월 영주 반구왜경소(盤邱倭警所)에 붙잡혔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14년 1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每日申報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柳義士傳(柳奎元, 독립운동사자료집 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金河洛陣中日記(金河洛, 독립운동사자료집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暴徒こ關スル編冊

[집필자]

박성수(朴成壽)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