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소(閔泳韶)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BFCC601C18CB1852X0 |
자(字) | 순약(舜若) |
생년 | 1852(철종 3) |
졸년 | 1917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여흥(驪興)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민규호(閔奎鎬) |
생부 | 민철호(閔哲鎬) |

[상세내용]
민영소(閔泳韶)
1852년(철종 3)∼1917년. 조선 말기의 척신(戚臣).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순약(舜若). 민철호(閔哲鎬)의 아들로, 민규호(閔奎鎬)에게 입양되었다.
1878년(고종 1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설서(說書)의 직책을 맡은 것을 시발점으로 장령‧응교 등의 벼슬을 거쳐 1885년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다가 춘천부사를 지냈다.
그뒤 호조판서‧직제학‧병조판서 및 한성부윤을 역임하였는데, 그 당시의 군변이나 정변을 무사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
1894년의 갑오개혁 기간에 일시 퇴진하였다가, 1895년 8월 민영환(閔泳煥)‧심상훈(沈相薰) 등 민씨일파와 더불어 궁내부특진관으로 임명되었다.
1899년 규장각학사와 규장각대교를 맡았고 이어 양지아문총재관(量地衙門摠裁官)을 지냈다.
1901년 학부대신, 1902년 궁내부대신, 1904년 농상공부대신‧중추원의장을 두루 역임하였다. 민씨척족세력의 거물로서 임오군변 때는 가옥이 파괴당하는 곤욕을 겪었다.
병조판서로 있을 때 왕의 밀지를 받아 이일직(李逸稙)으로 하여금 갑신정변 뒤 일본에 망명중인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등의 암살을 교사하였다.
그뒤 홍종우(洪鍾宇)를 자객으로 삼아 상해(上海)에서 김옥균을 살해한 배후의 인물로 부각되었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점당할 때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1910년 이후 실의와 좌절 속에서 삶을 영위하였다.
1878년(고종 1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설서(說書)의 직책을 맡은 것을 시발점으로 장령‧응교 등의 벼슬을 거쳐 1885년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다가 춘천부사를 지냈다.
그뒤 호조판서‧직제학‧병조판서 및 한성부윤을 역임하였는데, 그 당시의 군변이나 정변을 무사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
1894년의 갑오개혁 기간에 일시 퇴진하였다가, 1895년 8월 민영환(閔泳煥)‧심상훈(沈相薰) 등 민씨일파와 더불어 궁내부특진관으로 임명되었다.
1899년 규장각학사와 규장각대교를 맡았고 이어 양지아문총재관(量地衙門摠裁官)을 지냈다.
1901년 학부대신, 1902년 궁내부대신, 1904년 농상공부대신‧중추원의장을 두루 역임하였다. 민씨척족세력의 거물로서 임오군변 때는 가옥이 파괴당하는 곤욕을 겪었다.
병조판서로 있을 때 왕의 밀지를 받아 이일직(李逸稙)으로 하여금 갑신정변 뒤 일본에 망명중인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등의 암살을 교사하였다.
그뒤 홍종우(洪鍾宇)를 자객으로 삼아 상해(上海)에서 김옥균을 살해한 배후의 인물로 부각되었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점당할 때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1910년 이후 실의와 좌절 속에서 삶을 영위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文品案
每日申報
統署日記
俄館播遷(李鉉淙, 한국사 18, 국사편찬위원회, 1973)
日省錄
承政院日記
文品案
每日申報
統署日記
俄館播遷(李鉉淙, 한국사 18, 국사편찬위원회, 1973)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명 : "영소(泳韶)"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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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