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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우(洪鍾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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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숙(聲肅)
호(號)우정(羽亭)
생년1850(철종 1)
졸년1913
시대조선후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친일
홍재원(洪在源)

[상세내용]

홍종우(洪鍾宇)
1850년(철종 1)(주1)
생년
본인의 문과방목을 참고하여 생년을 갑인(1854)에서 경술(1850)로 수정함.
∼1913년. 조선 말기의 정객. 자는 성숙(聲肅), 호는 우정(羽亭). 본관은 남양(南陽[唐]).

홍재원(洪在源)의 아들이다.

1890년(고종 27) 말에 법률을 공부하기 위하여 프랑스에 갔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파리의 키메박물관 촉탁으로 있으면서 「춘향전」‧「심청전」 등 한국고전을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1893년 7월 파리를 떠나 귀국하던 길에 동경(東京)에 머무르면서 친구 김유식(金有植)을 통하여 이일직(李逸稙)과 만나게 되었다.

이때 이일직은 자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역적으로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을 주벌(誅伐)하라는 국왕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왔다고 털어놓은 뒤 김옥균을 암살하는 일에 가담하여 줄 것을 권유하였다.

이 제의를 받아들여 그뒤 동지로 가장하고 김옥균에 접근하여 마침내 그를 중국 상해(上海)로 유인하는 데 성공하였다. 1894년 3월 28일 상해 미국 조계(租界)내의 일본호텔 동화양행(同和洋行)에 투숙한 김옥균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그곳의 경찰에 붙잡혔다.

그러나 조선정부와 청국정부의 교섭으로 석방되어 4월 13일 청국군함의 호송을 받으면서 김옥균의 시체를 가지고 양화진(楊花津)으로 귀국하였으며, 김옥균 암살의 공으로 고종과 민씨척족 정권으로부터 홍문관교리직을 제수받고 서울에 사택(舍宅)까지 하사받아 세도를 누렸다.

1898년 황국협회(皇國協會)에 가담한 뒤 길영수(吉永洙) 등과 함께 약 2,000명의 보부상(褓負商)을 동원하여 독립협회가 개최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습격하고 앞서 독립협회를 모함한 죄로 구금된 조병식(趙秉式) 등을 지지하는 가두연설을 하는 등 수구파 정권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이 때문에 그는 개화세력에 의하여 길영수박유진(朴有鎭)과 더불어 삼간(三奸)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1898년말에 독립협회가 해체되자 수구파내각의 의정부총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朝鮮開化秘譚(金永鍵, 正音社, 1947)
韓國史―最近世篇―(震檀學會, 乙酉文化社, 1961)
獨立協會硏究(愼鏞廈, 一潮閣, 1976)
近代日鮮關係の硏究(田保橋潔, 朝鮮總督府, 1940)

[집필자]

유영익(柳永益)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