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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긍(李源兢)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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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공리(公履)
호(號)취당(取堂)
생년1849(헌종 15)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두진(李斗鎭)
출신지충청북도 괴산
저서『경성약기(京城略記)』

[상세내용]

이원긍(李源兢)
1849년(헌종 15)∼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리(公履), 호는 취당(取堂). 충청북도 괴산 출신. 이두진(李斗鎭)의 아들이며, 국학자 이능화(李能和)의 아버지이다.

진사로서 음성현감춘천판관을 역임하고, 1891년(고종 28)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이조참의북청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894년 내무아문참의가 되고, 갑오개혁 때 신설된 군국기무처의 회의원(會議員)이 되었다.

그뒤 법부협판을 지냈는데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독립협회 회원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썼다.

1898년 3월 15일 여규형(呂圭亨)지석영(池錫永)안기중(安沂中) 등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시종원시종 김영준(金永準)의 무고로 잡혀 투옥 당하고 민심을 현혹시켰다는 죄로 10년 유배형을 받게 되었는데, 독립협회가 인권옹호를 강경히 주장하고 정부의 횡포를 규탄함으로써 6월 29일 석방되었다.

1901년 황국협회의 무고로 인한 독립협회 지도자에 대한 일련의 검거선풍으로 말미암아 3년간의 옥고를 겪은 뒤, 1904년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더불어 석방되었다.

수감되어 있을 때 미국선교사 방커(Bunker, 房巨)의 교화로 기독교신도가 되고 출옥 후 케일(Cail, 奇一)목사가 주관하던 연동교회에 잠시 다녔다. 뒤에 함태영(咸台永)조종만(趙鍾萬) 등과 함께 사재를 털어 지금의 봉익동에 분동교회를 따로 세웠다.

1907년 국민교육회를 조직하여 계몽과 민족정신 앙양에 힘썼다.

저서로는 『경성약기(京城略記)』가 있다.

[참고문헌]

大韓季年史
韓國痛史
韓國獨立運動史 1(國史編纂委員會, 1965)
槐山郡誌(槐山郡誌編纂委員會, 1969)

[집필자]

이종춘(李鍾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