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규형(呂圭亨)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5ECADDCD615B1848X0 |
자(字) | 사원(士元) |
호(號) | 하정(荷亭) |
생년 | 1848(헌종 14) |
졸년 | 192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함양(咸陽)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부 | 여풍섭(呂豊燮) |
모 | 윤씨(尹氏) |
저서 | 『하정유고』 |
[상세내용]
여규형(呂圭亨)
1848년(헌종 14)∼1921년. 조선 말기‧일제강점기의 학자‧문인.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사원(士元), 호는 하정(荷亭).
부친은 여풍섭(呂豊燮)이며, 모친은 윤씨(尹氏)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자라면서부터 문장에 능하고 총명이 뛰어났다고 한다.
1882년(고종 19)에 문과에 급제하여 외아문주사(外衙門主事)에 임명되었다가, 교리를 제수받았다.
1886년에는 신기선(申箕善)의 역옥을 신문할 때, 문랑(問郞)으로서 신기선의 빠른 대답을 번개같은 솜씨로 받아적어서 사람들로부터 문재가 뛰어나다고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벼슬은 오래도록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으니, 왕과 민비(閔妃)가 요무(妖巫) 진령군(眞靈君)의 말을 믿고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을 멀리하여 전고(銓考)에 들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위직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곧 사간에 제수되었지만, 이때 당론을 달리하는 동료가 그의 인품을 논하자 칭병하고 사직하였으나 익산에 귀양가게 되었다.
귀양에서 돌아와 몇 년 지나서 민영달(閔泳達)의 연회에 가서 지은 “술은 회수(淮水)와 같고 고기는 산과 같다(有酒如淮肉似山).”라는 구절이 임금의 눈에 난 데다가 과장(科場)의 일에 연루되어 1893년에 다시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었다.
1894년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다시 초도(椒島)에 유배되었다가 일제에 의하여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풀려났다.
서울에 돌아와서 사립학교인 대동학교(大東學校)에서 교사로서 학도를 가르쳤으며, 뒤에는 관립한성고등학교의 주임교유에 임명되어 한문과를 담당하다가 74세에 죽었다. 잦은 유배로 생활이 불안정하였으므로, 집은 매우 가난하여 이틀에 한번 불을 때어 밥을 지을 정도였다고 한다.
재주가 뛰어났지만 성품이 방달불기(放達不羈)한데다가 오랫동안 침굴(沈屈)하여 있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 쌓인 수심을 오로지 술로 풀려고 하였다.
그는 시문에 매우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음률에도 통하고, 기하‧산수‧초목‧충어(蟲魚)‧성력(星曆) 등의 학문에도 두루 밝았다고 한다. 그래서 시‧서‧문을 비롯하여 사(射)‧금(琴)‧기(棋)‧주(酒)를 잘한다고 하여 칠절(七絶)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뛰어난 문장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숱한 기행(奇行)으로 이건창(李建昌)‧김윤식(金允植)‧정만조(鄭萬朝) 등과 한문학사의 대미를 장식한 한학자로서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황현(黃玹)이 그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개화 이래 외인(外人)을 따라붙어 한발짝이라도 뒤떨어질까 걱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침뱉고 욕하였다.”라고 한 대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만년에 일제의 노선에 동조한 행위가 흠으로 지적된다.
문집으로 『하정유고』 4권이 전하며, 이밖에도 「춘향전」과 「심청전」을 한문으로 짓기도 하였다.
부친은 여풍섭(呂豊燮)이며, 모친은 윤씨(尹氏)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자라면서부터 문장에 능하고 총명이 뛰어났다고 한다.
1882년(고종 19)에 문과에 급제하여 외아문주사(外衙門主事)에 임명되었다가, 교리를 제수받았다.
1886년에는 신기선(申箕善)의 역옥을 신문할 때, 문랑(問郞)으로서 신기선의 빠른 대답을 번개같은 솜씨로 받아적어서 사람들로부터 문재가 뛰어나다고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벼슬은 오래도록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으니, 왕과 민비(閔妃)가 요무(妖巫) 진령군(眞靈君)의 말을 믿고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을 멀리하여 전고(銓考)에 들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위직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곧 사간에 제수되었지만, 이때 당론을 달리하는 동료가 그의 인품을 논하자 칭병하고 사직하였으나 익산에 귀양가게 되었다.
귀양에서 돌아와 몇 년 지나서 민영달(閔泳達)의 연회에 가서 지은 “술은 회수(淮水)와 같고 고기는 산과 같다(有酒如淮肉似山).”라는 구절이 임금의 눈에 난 데다가 과장(科場)의 일에 연루되어 1893년에 다시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었다.
1894년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다시 초도(椒島)에 유배되었다가 일제에 의하여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풀려났다.
서울에 돌아와서 사립학교인 대동학교(大東學校)에서 교사로서 학도를 가르쳤으며, 뒤에는 관립한성고등학교의 주임교유에 임명되어 한문과를 담당하다가 74세에 죽었다. 잦은 유배로 생활이 불안정하였으므로, 집은 매우 가난하여 이틀에 한번 불을 때어 밥을 지을 정도였다고 한다.
재주가 뛰어났지만 성품이 방달불기(放達不羈)한데다가 오랫동안 침굴(沈屈)하여 있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 쌓인 수심을 오로지 술로 풀려고 하였다.
그는 시문에 매우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음률에도 통하고, 기하‧산수‧초목‧충어(蟲魚)‧성력(星曆) 등의 학문에도 두루 밝았다고 한다. 그래서 시‧서‧문을 비롯하여 사(射)‧금(琴)‧기(棋)‧주(酒)를 잘한다고 하여 칠절(七絶)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뛰어난 문장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숱한 기행(奇行)으로 이건창(李建昌)‧김윤식(金允植)‧정만조(鄭萬朝) 등과 한문학사의 대미를 장식한 한학자로서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황현(黃玹)이 그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개화 이래 외인(外人)을 따라붙어 한발짝이라도 뒤떨어질까 걱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침뱉고 욕하였다.”라고 한 대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만년에 일제의 노선에 동조한 행위가 흠으로 지적된다.
문집으로 『하정유고』 4권이 전하며, 이밖에도 「춘향전」과 「심청전」을 한문으로 짓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荷亭遺稿
梅泉野錄(黃玹)
薝園文錄(鄭寅普)
荷亭遺作―演本沈淸傳序―(高橋亨, 朝鮮學報 11, 朝鮮學會, 1957)
梅泉野錄(黃玹)
薝園文錄(鄭寅普)
荷亭遺作―演本沈淸傳序―(高橋亨, 朝鮮學報 11, 朝鮮學會, 1957)
[집필자]
윤호진(尹浩鎭)
대표명 | 여규형(呂圭亨) |
성명 | 여규형(呂圭亨) |
성명 : "여규형(呂圭亨)"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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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