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웅렬(尹雄烈)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4C6C5B82CB1840X0 |
생년 | 1840(헌종 6) |
졸년 | 191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해평(海平)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출신지 | 충청남도 아산 |
[관련정보]
[상세내용]
윤웅렬(尹雄烈)
1840년(헌종 6)∼1911년.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해평(海平). 충청남도 아산 출신. 한말 정치가 윤치호(尹致昊)의 아버지이다.
1856년(철종 7) 무과에 급제한 뒤 1861년 충청감영중군 겸 공주중군으로, 이듬해에 함경북도병마우후토포사(咸鏡北道兵馬虞侯討捕使)로 임명되었다.
1878년(고종 15) 남양부사를 역임하였고, 1880년에는 2차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는데, 당시 직함은 군관전중군(軍官前中軍)이었다. 동경에서 흥아회(興亞會)의 초대를 받아 일본의 조야인사(朝野人士)들과 교유를 가졌다. 일본을 다녀온 이듬해에 함경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881년에는 오영군문(五營軍門)으로부터 지원자 80명을 선발하여 무위영(武衛營) 소속으로 조선 최초의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의 좌부령관(左副領官)에 임명되어 별기군 운영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별기군의 창설은 구군대와의 차별대우로 대립되면서 1882년 임오군란을 초래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공관에 정원(偵員) 이승모(李承謨)를 보내어 군민들이 일본공관을 습격할 계획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일본 판리공사(辦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에게 통보하고 자위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였다. 군란이 점차 확대되면서 군민들이 그의 집과 친일인사들의 가옥을 파괴하고 일본공관을 습격하자 일본공사 일행과 함께 나가사키(長崎)로 피신하였다.
그뒤 정국이 안정되자 귀국하여 개화당(開化黨)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개화당의 과격하고 혁신적인 행동전개에 대하여 신중론을 펴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1884년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혁을 단행할 때는 내각의 형조판서로 입각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
그뒤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주도권 다툼으로 정세는 심각하여졌고, 일본은 민씨 척족정권을 타도하고 임오군란 실패로 몰락한 대원군을 재등장시켜 새로운 정권수립을 꾀하였다. 이에 문벌타파 및 인재등용과 아울러 정치죄인의 석방을 명할 때 함께 석방되었다.
1895년 제3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경무사(警務使)로 임명되었다. 같은해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의 침략기운이 노골화되자, 일본세력에 의지하고 있던 친일정권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항일분위기가 높아졌다.
이에 편승한 일부 전직 고관 및 군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국상이 발표되기 3일 전인 10월 12일 국왕을 대궐 밖으로 모시어 국모살해에 대한 보복을 하고자 일으킨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정동파인사(貞洞派人士)로서 이에 호응, 배후에서 조정하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1896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참장군부협판(參將軍部協辦)에 임명되고, 1898년 중추원 1등의관이 되었으며, 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법부협판‧의정부찬정을 겸임하였다.
또한, 법부대신 겸임 고등재판소재판장에 임명되고, 궁내부특진관‧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독립협회 회원을 비호하였다는 논척을 받기도 하였으며, 같은해 귀족원경(貴族院卿)에 임명되었다.
1902년에 특진관으로서 임시서리평리원재판장사무(臨時署理平理院裁判長事務)를 맡았으며, 이듬해 다시 군부대신에 임명되었고, 이어 내장원경사무(內藏院卿事務)를 겸임하였다.
1903년에는 군부대신으로서 임시서리원수부검사국총장사무(臨時署理元帥府檢查局總長事務)를 겸임하였다.
1910년 8월 국권상실 이후 일본정부가 황실‧황족에 대한 대우와 친일인사들에 대한 행상을 실시할 때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1856년(철종 7) 무과에 급제한 뒤 1861년 충청감영중군 겸 공주중군으로, 이듬해에 함경북도병마우후토포사(咸鏡北道兵馬虞侯討捕使)로 임명되었다.
1878년(고종 15) 남양부사를 역임하였고, 1880년에는 2차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는데, 당시 직함은 군관전중군(軍官前中軍)이었다. 동경에서 흥아회(興亞會)의 초대를 받아 일본의 조야인사(朝野人士)들과 교유를 가졌다. 일본을 다녀온 이듬해에 함경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881년에는 오영군문(五營軍門)으로부터 지원자 80명을 선발하여 무위영(武衛營) 소속으로 조선 최초의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의 좌부령관(左副領官)에 임명되어 별기군 운영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별기군의 창설은 구군대와의 차별대우로 대립되면서 1882년 임오군란을 초래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공관에 정원(偵員) 이승모(李承謨)를 보내어 군민들이 일본공관을 습격할 계획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일본 판리공사(辦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에게 통보하고 자위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였다. 군란이 점차 확대되면서 군민들이 그의 집과 친일인사들의 가옥을 파괴하고 일본공관을 습격하자 일본공사 일행과 함께 나가사키(長崎)로 피신하였다.
그뒤 정국이 안정되자 귀국하여 개화당(開化黨)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개화당의 과격하고 혁신적인 행동전개에 대하여 신중론을 펴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1884년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혁을 단행할 때는 내각의 형조판서로 입각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
그뒤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주도권 다툼으로 정세는 심각하여졌고, 일본은 민씨 척족정권을 타도하고 임오군란 실패로 몰락한 대원군을 재등장시켜 새로운 정권수립을 꾀하였다. 이에 문벌타파 및 인재등용과 아울러 정치죄인의 석방을 명할 때 함께 석방되었다.
1895년 제3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경무사(警務使)로 임명되었다. 같은해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의 침략기운이 노골화되자, 일본세력에 의지하고 있던 친일정권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항일분위기가 높아졌다.
이에 편승한 일부 전직 고관 및 군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국상이 발표되기 3일 전인 10월 12일 국왕을 대궐 밖으로 모시어 국모살해에 대한 보복을 하고자 일으킨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정동파인사(貞洞派人士)로서 이에 호응, 배후에서 조정하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1896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참장군부협판(參將軍部協辦)에 임명되고, 1898년 중추원 1등의관이 되었으며, 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법부협판‧의정부찬정을 겸임하였다.
또한, 법부대신 겸임 고등재판소재판장에 임명되고, 궁내부특진관‧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독립협회 회원을 비호하였다는 논척을 받기도 하였으며, 같은해 귀족원경(貴族院卿)에 임명되었다.
1902년에 특진관으로서 임시서리평리원재판장사무(臨時署理平理院裁判長事務)를 맡았으며, 이듬해 다시 군부대신에 임명되었고, 이어 내장원경사무(內藏院卿事務)를 겸임하였다.
1903년에는 군부대신으로서 임시서리원수부검사국총장사무(臨時署理元帥府檢查局總長事務)를 겸임하였다.
1910년 8월 국권상실 이후 일본정부가 황실‧황족에 대한 대우와 친일인사들에 대한 행상을 실시할 때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참고문헌]
日省錄
承政院日記
大韓季年史
佐翁尹致昊先生略傳(金永義, 基督敎朝鮮監理會總理院, 1934)
承政院日記
大韓季年史
佐翁尹致昊先生略傳(金永義, 基督敎朝鮮監理會總理院, 1934)
[집필자]
원유한(元裕漢)
대표명 | 윤웅렬(尹雄烈) |
성명 | 윤웅렬(尹雄烈) |
성명 : "윤웅렬(尹雄烈)"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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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