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연(金有淵)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720C5F0B1819X0 |
자(字) | 원약(元若) |
호(號) | 약산(藥山) |
시호(諡號) | 정익(貞翼) |
생년 | 1819(순조 19) |
졸년 | 1887(고종 24)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연안(延安)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영(金鑅) |
생부 | 김헌(金𨯶) |
조부 | 김재찬(金載瓚) |

[상세내용]
김유연(金有淵)
1819년(순조 19)∼1887년(고종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원약(元若), 호는 약산(藥山).
조부는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이며 부친은 김헌(金𨯶)으로, 목사(牧使) 김영(金鑅)에게 입양되었다.
1844년(헌종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었고, 1862년(철종 12) 이조참의‧예방승지‧이조참판을 역임한 뒤 1866년(고종 3)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변경방비 및 국경통상 등 여러가지 문제를 처리하였다.
1868년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한성부판윤‧대사헌‧반송사(伴送使) 등을 거쳐 관북지방 안무사(按撫使)로 나가 많은 폐단을 바로잡는 데 공이 컸다.
1880년에 다시 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이후 호조판서‧변리통리내무아문사무(辨理統理內務衙門事務)‧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판의금부사‧공조판서‧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고, 판중추부사로 죽었다.
그는 관력 42년에 그 자세가 중후, 신중하였고 나라에 대한 충성이 절실하였으며, 특히 관북지방 통치에 업적이 컸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조부는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이며 부친은 김헌(金𨯶)으로, 목사(牧使) 김영(金鑅)에게 입양되었다.
1844년(헌종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었고, 1862년(철종 12) 이조참의‧예방승지‧이조참판을 역임한 뒤 1866년(고종 3)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변경방비 및 국경통상 등 여러가지 문제를 처리하였다.
1868년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한성부판윤‧대사헌‧반송사(伴送使) 등을 거쳐 관북지방 안무사(按撫使)로 나가 많은 폐단을 바로잡는 데 공이 컸다.
1880년에 다시 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이후 호조판서‧변리통리내무아문사무(辨理統理內務衙門事務)‧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판의금부사‧공조판서‧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고, 판중추부사로 죽었다.
그는 관력 42년에 그 자세가 중후, 신중하였고 나라에 대한 충성이 절실하였으며, 특히 관북지방 통치에 업적이 컸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紀年便攷
國朝榜目
哲宗實錄
高宗實錄
紀年便攷
國朝榜目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 : "���������(���������)"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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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