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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영(趙寅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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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희경(羲卿)
호(號)운석(雲石)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782(정조 6)
졸년1850(철종 1)
시대조선후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진관(趙鎭寬)
저서『운석유고』

[상세내용]

조인영(趙寅永)
1782년(정조 6)∼1850년(철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경(羲卿), 호는 운석(雲石). 이조판서 조진관(趙鎭寬)의 아들이며, 국구(國舅) 조만영(趙萬永)의 동생이다.

1819년(순조 19)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바로 응교에 임명되고, 그해 형의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선입되었다.

1822년 함경도암행어사로 복명 후 대사헌에 특진하였으며, 1826년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조참의대사성세손좌유선(世孫左諭善)제학예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30년 세자(뒤에 翼宗으로 추존)가 죽자 세손부(世孫傅)우부빈객으로서 나이 어린 세손의 보호에 힘썼으며, 1834년 세손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바로 이조판서에 기용되고, 이어 대제학, 호조형조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훈련대장 등 군사권을 장악한 형 조만영과 함께 풍양조씨세도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839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己亥邪獄)을 주도, 그해 우의정에 올라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찬진(撰進)하였으며, 1841년(헌종 7) 영의정이 되어 안동김씨를 압도하고 풍양조씨의 세도를 확립하였으나 1846년 형이 죽자 실세(失勢), 벼슬에서 물러났다.

1849년 철종 즉위 후 민심수습의 일환으로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곧 죽었다.

10여년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국가재정의 확보와 민생문제에 대한 개선책을 자주 건의하였고, 이단이 성행하는 것은 정학(正學: 朱子學)이 천명되지 못한 때문이라 하여 도산화양 등의 서원에 대한 특전(特典)의 부여와 충신‧의사의 포증(褒贈), 경명행수(經明行修)한 선비의 발탁 등을 주장하였다.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우리나라의 금석문(金石文)을 수집, 금석학연구에 정진하였으며, 특히 1816년 성절사(聖節使)일행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을 때 청의 금석학자 유연정(劉燕庭)과 교유, 그에게 조선 금석탁본(金石拓本) 수십종을 기증하였다.

다음해 귀국하여 김정희와 함께 비봉(碑峰)에 올라, 앞서 발견하였던 비가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임을 확인, 68자를 심정(審定)하여 탁본을 작성하고 함께 엄밀한 고증을 거친 다음 이를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와 함께 다시 유연정에게 보내어, 그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문장‧글씨‧그림에 모두 능하였고 1847년 왕명으로 국조보감찬집청(國朝寶鑑纂輯廳)의 총재가 되어 정조순조의 두 왕 및 문조(文祖: 翼宗)대리청정 때의 보감을 편찬하였다. 뒤에 헌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운석유고』 20권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哲宗實錄
雲石遺稿
朝鮮圖書解題(朝鮮總督府, 1932)

[집필자]

정만조(鄭萬祚)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