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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주(洪奭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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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백(成伯)
호(號)연천(淵泉)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774(영조 50)
졸년1842(헌종 8)
시대조선후기
본관풍산(豊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인모(洪仁謨)
조부홍낙성(洪樂性)
저서『연천집』
저서『학해(學海)』
저서『영가삼이집(永嘉三怡集)』
저서『동사세가(東史世家)』
저서『학강산필(鶴岡散筆)』

[상세내용]

홍석주(洪奭周)
1774년(영조 50)∼1842년(헌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백(成伯), 호는 연천(淵泉).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의 손자이며, 우부승지 홍인모(洪仁謨)의 아들이다.

약관에 모시(毛詩)‧경례(經禮)‧자사(子史)‧육예백가(六藝百家)의 글을 모두 읽어 성가(成家)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번 읽은 글은 평생 기억하는 총명을 갖추어 동료들이 감복하는 바가 되었다.

1795년(정조 19)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받고, 그해 춘당대문과에갑과로 급제하여 사옹원직장을 제수받았다.

1797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1802년(순조 2) 정언이 되었으며, 1807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가선대부에 올라 병조참판이 되고, 1815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뒤 1832년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거쳐, 1834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그뒤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손부를 제배받고 1842년에 죽었다.

그는 과제(科第)로 출신(出身)하여 좌의정까지 이르렀는데, 자품이 고요하고 겸허하여 지위가 정승에 올랐지만 처하기를 평민과 같이하였다. 그리고 학문이 심수하고 의리에도 정통하여 시서역예(詩書易禮)의 교훈과 성명이기(性命理氣)의 철학에 달통하였다.

그는 특히 도학가적인 문학론을 전개하여 “심외무부(心外無父)요 도외무심(道外無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문(文)’이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마음이 닦아지고 학문이 충적되면 그것이 밖으로 나타날 때 덕(德)도 되고 도(道)도 되며, 어(語)도 되고 문도 되어 도‧덕‧어‧문이 기실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은 충적된 공부도 없이 입만으로 인의성경(仁義誠敬)을 외치므로 말은 문과 맞지 않고 마음은 말과 응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秦)‧한(漢)의 고문(古文)을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면서 의고문가(擬古文家: 秦漢派)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진‧한의 고문은 한유(韓愈)구양수(歐陽修)같은 대문호도 미칠 수 없음을 탄식하였으므로 그를 배우려는 것은 큰 우거(愚擧)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천지만상이 쉬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복고가 안 되는 것은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라 형세가 그렇게 되어 안 되는 것이라며 시의에 맞는 진솔한 글을 쓸 것을 역설하였다.

김윤식(金允植)은 “보취(步趣)에 법도가 있어 구확(矩矱: 법)의 밖을 넘지 아니하며, 우여용용(紆餘舂容)하여 감격적이면서도 상하지 않으니 실로 치세(治世)의 글이다.”라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연천집』『학해(學海)』『영가삼이집(永嘉三怡集)』『동사세가(東史世家)』『학강산필(鶴岡散筆)』 등이 있고, 편서로는 『속사략익전(續史略翼箋)』『상예회수(象藝薈粹)』『풍산세고(豊山世稿)』『대기지의(戴記志疑)』『마방통휘(麻方統彙)』『상서보전(尙書補傳)』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梅山集
湖巖全集
淵泉集附編家狀
朝鮮儒敎淵源(張志淵, 匯東書館, 1922)
朝鮮儒敎史(玄相允, 民衆書館, 1949)
古文의 源流와 性格(金都鍊, 韓國學論叢 2, 1979)

[집필자]

김도련(金都鍊)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