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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희(南景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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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은(仲殷)
호(號)치암(癡菴)
생년1748(영조 24)
졸년1812(순조 12)
시대조선후기
본관영양(英陽)
활동분야학자 > 유생
남용만(南龍萬)
저서『치암선생문집』

[상세내용]

남경희(南景羲)
1748년(영조 24)∼1812년(순조 1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중은(仲殷), 호는 치암(癡菴). 남용만(南龍萬)의 아들이다.

1777년(정조 1) 국왕의 즉위기념 증광시(增廣試)에 합격, 진사가 되었고, 동시에 문과에도 급제하였다.

1788년경부터 승문원박사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병조좌랑을 거쳐 사간원정언에 이르렀다.

1791년 사직하고 고향인 경상도 경주 보문리로 돌아온 뒤부터는 정범조(丁範祖)이익운(李益運) 등의 정치참여 권유도 뿌리치고 스스로 은거하였다. 자신을 소강절(邵康節)에 비유하여 영호(影湖)에 지연계당(止淵溪堂)을 지어 생도들을 가르치고, 봄‧가을에는 사우(士友)들과 강회(講會)를 열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어느날 독서를 하고 있을 때 부인이 곁에 와서 양식이 떨어졌다고 하였으나 묵묵부답하였고, 또 집안일을 말해도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를 보고 있던 다섯살 난 어린 딸이 어머니에게 왜 못난 사람과 말하느라 고생하느냐고 하였으므로 자기도 모르게 실소(失笑)를 하고는, 그뒤 자신도 돌보지 못하면서 민생이니 세도를 걱정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여 스스로 치암이라 호하였다 한다.

8세 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고 비평할 정도의 재능을 보였으며, 이상정(李象靖)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의리에 투철하여 『근사록(近思錄)』『맹자의난(孟子疑難)』을 애독하였다.

이만운(李萬運)과 세교(世交)가 있었고, 이기경(李基慶)이우(李瑀)한치응(韓致應) 등과 가깝게 지냈다.

저서로 『치암선생문집』 12권 6책이 전한다.

[참고문헌]

國朝榜目
癡菴文集

[집필자]

박광용(朴光用)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