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린(徐有隣)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1CC720B9B0B1738X0 |
자(字) | 원덕(元德) |
시호(諡號) | 문헌(文獻) |
생년 | 1738(영조 14) |
졸년 | 1802(순조 2)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대구(大丘)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서효수(徐孝修) |
[관련정보]
[상세내용]
서유린(徐有隣)
1738년(영조 14)∼1802년(순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원덕(元德). 교리 서효수(徐孝修)의 아들이다.
1766년(영조 42)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을 거쳐 1772년에는 승지가 되었으며, 다음해 대사헌을 지냈다.
1780년(정조 4)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그 지방의 군제(軍制)를 개편하여 국방강화에 노력하였으며, 1784년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직(軍職)개편을 통해 무인(武人)들의 사기진작에 주력하였다.
1786년에는 좌참찬에 올랐으며, 2년 뒤에는 공시당상(貢市堂上)이 되어 국경지방의 무역을 관장하였다.
특히 그는 충절을 기리기 위해 1788년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크게 공헌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사당을 새로 건축하게 하였고, 1790년에는 다시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유응부(兪應孚)의 묘비를 잘 관리하도록 경제적 뒷받침을 하였다.
1795년에는 판의금부사를 거쳐 한성부판윤‧수원부유수를 지냈다.
1800년(순조 즉위)에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에 의해 경흥에 유배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1766년(영조 42)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을 거쳐 1772년에는 승지가 되었으며, 다음해 대사헌을 지냈다.
1780년(정조 4)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그 지방의 군제(軍制)를 개편하여 국방강화에 노력하였으며, 1784년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직(軍職)개편을 통해 무인(武人)들의 사기진작에 주력하였다.
1786년에는 좌참찬에 올랐으며, 2년 뒤에는 공시당상(貢市堂上)이 되어 국경지방의 무역을 관장하였다.
특히 그는 충절을 기리기 위해 1788년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크게 공헌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사당을 새로 건축하게 하였고, 1790년에는 다시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유응부(兪應孚)의 묘비를 잘 관리하도록 경제적 뒷받침을 하였다.
1795년에는 판의금부사를 거쳐 한성부판윤‧수원부유수를 지냈다.
1800년(순조 즉위)에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에 의해 경흥에 유배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朝鮮金石總覽
正祖實錄
國朝榜目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김호종(金昊鍾)
명 : "유린(有隣)"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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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1-01-04 | 문과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