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윤(宋東胤)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A1B3D9C724B1729X0 |
자(字) | 하승(夏承) |
호(號) | 서계(西溪) |
생년 | 1729(영조 5) |
졸년 | 1799(정조 23)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양주(楊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송형태(宋亨泰) |
모 | 예안김씨(禮安金氏) |
외조부 | 김학창(金學昌) |
저서 | 『서계유집』 |
[상세내용]
송동윤(宋東胤)
1729년(영조 5)∼1799년(정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하승(夏承), 호는 서계(西溪).
부친은 송형태(宋亨泰)이며, 모친은 예안김씨(禮安金氏)로 김학창(金學昌)의 딸이다. 조원승(趙元升)의 문인이다.
1762년(영조 38) 증광시(增廣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1771년 승문원의 저작을 거쳐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성균관전적을 지낸 뒤 직강(直講)으로 있으면서 어제시(御製詩)를 반하(頒下)하였다.
병조좌랑에 재직할 때 병영(兵營)에서 징수하는 군포(軍布)를 너무 과중히 책정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상사에게 보고하여 세리의 횡포를 막는 방안을 모색하고 책정된 군포의 분량을 격감시킴으로써 민생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예조좌랑으로 재직할 때는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실록을 보관하는 일에 공로가 있었다.
1789년(정조 13) 이후로 충청도도사‧사헌부감찰‧삼례우승(參禮郵丞)을 역임하였다.
1791년 63세 되던 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교육을 통한 후진양성과 고을의 폐단과 악습을 개혁하는 데 매진하였다.
저서로는 『서계유집』이 있다.
부친은 송형태(宋亨泰)이며, 모친은 예안김씨(禮安金氏)로 김학창(金學昌)의 딸이다. 조원승(趙元升)의 문인이다.
1762년(영조 38) 증광시(增廣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1771년 승문원의 저작을 거쳐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성균관전적을 지낸 뒤 직강(直講)으로 있으면서 어제시(御製詩)를 반하(頒下)하였다.
병조좌랑에 재직할 때 병영(兵營)에서 징수하는 군포(軍布)를 너무 과중히 책정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상사에게 보고하여 세리의 횡포를 막는 방안을 모색하고 책정된 군포의 분량을 격감시킴으로써 민생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예조좌랑으로 재직할 때는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실록을 보관하는 일에 공로가 있었다.
1789년(정조 13) 이후로 충청도도사‧사헌부감찰‧삼례우승(參禮郵丞)을 역임하였다.
1791년 63세 되던 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교육을 통한 후진양성과 고을의 폐단과 악습을 개혁하는 데 매진하였다.
저서로는 『서계유집』이 있다.
[참고문헌]
西溪遺集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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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