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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수(徐逈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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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의(士毅)
호(號)직재(直齋)
생년1725(영조 1)
졸년1779(정조 3)
시대조선후기
본관대구(大丘)
활동분야문신 > 문신
서명훈(徐命勳)

[상세내용]

서형수(徐逈修)
1725년(영조 1)∼1779년(정조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사의(士毅), 호는 직재(直齋).

부친은 현령 서명훈(徐命勳)이다. 이재(李縡)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1751년(영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척신(戚臣) 홍계희(洪啓禧) 등 요인들이 교유를 청해온 것을 거절하여 관계의 진출이 늦어졌다.

1757년 정언(正言)으로서 윤시동(尹蓍東)의 신구(伸救)를 청하였으나 당쟁을 일삼는다 하여 남해현(南海縣)으로 방귀(放歸)되었다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그뒤 교리 이심원(李心源), 도승지 한수창(韓壽昌), 정언 신익빈(申益彬), 대사간 이인배(李仁培) 등이 언로의 개방과 확장을 청하면서 그의 서용을 주장하였으나, 도리어 이심원이인배 등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체직을 당하였다.

1767년 국가 경사로 인한 사면조치로 유배에서 풀려나왔으나 그해 서용되지 못하고 이듬해 사서(司書)로 서용되었다.

1771년 교리로서 척신의 자제가 대거 대과(大科)에 급제하는 폐단의 시정을 촉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승지로서 국가 대훈자(大勳者)의 특전이 너무 지나침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였다.

그해 벽파(僻派)를 탄핵하였다가 면직당하고 폐서인(廢庶人)이 되어 쫓겨났다.

1773년 승지로 재기용된 뒤 대사간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776년(정조 즉위) 공조참의에 이르러 홍인한(洪麟漢)이득신(李得臣)일파의 전횡을 규치할 것을 계속 주장하였고, 그뒤 대사간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1-03문과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