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吳瓚)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624CC2CFFFFB1717X0 |
자(字) | 경부(敬夫) |
호(號) | 청수재(淸修齋) |
생년 | 1717(숙종 43) |
졸년 | 1751(영조 27)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해주(海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오이주(吳履周) |
생부 | 오진주(吳晉周) |
생모 | 서씨(徐氏) |
조부 | 오두인(吳斗寅) |
증조부 | 오숙(吳䎘) |
처부 | 심사주(沈師周) |
외조부 | 이숙(李䎘) |
[상세내용]
오찬(吳瓚)
1717년(숙종 43)∼1751년(영조 27).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경부(敬夫), 호는 청수재(淸修齋).
증조부는 오숙(吳䎘), 조부는 오두인(吳斗寅), 생부 오진주(吳晉周)와 서씨(徐氏) 사이에서 4남 중 4남으로 태어났으며, 오이주(吳履周)에 입적되었다. 외조부는 이숙(李䎘), 처부는 심사주(沈師周)이며, 이복형 대제학 오원(吳瑗)이 있고, 동생으로는 오완(吳琬), 오관(吳瓘), 오찬(吳璨)이 있으며, 서제 오무(吳珷)가 있다.
35세 때 1751년(영조 27) 신미(辛未) 춘당대시(春塘臺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로 급제하였다. 1751년에 정언(正言)에 제수된 후 오찬은 징토를 엄히 할 것과 시비를 분명히 할 것 등을 상서(上書)하여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사직(司直) 이종성(李宗城)이 흉역(凶逆)들과 어울린다는 상서를 계속 올리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피임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같은 해 내수사(內需司)를 파할 것을 청하자 급기야 영조는 진노(震怒)하여, 오찬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성문 밖으로 쫒아냈다. 후에 삼수(三水: 함경남도 삼수군)로 귀양 보내져, 그곳에서 죽었는데 관직에 오른 지 1년 만이었다. 할 말을 다 하는 성격으로 관직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변방으로 쫓겨 가 그곳에서 죽자 사람들이 가엾게 여겼으며, 경쇠(磬―)를 매우 좋아하였다.
증조부는 오숙(吳䎘), 조부는 오두인(吳斗寅), 생부 오진주(吳晉周)와 서씨(徐氏) 사이에서 4남 중 4남으로 태어났으며, 오이주(吳履周)에 입적되었다. 외조부는 이숙(李䎘), 처부는 심사주(沈師周)이며, 이복형 대제학 오원(吳瑗)이 있고, 동생으로는 오완(吳琬), 오관(吳瓘), 오찬(吳璨)이 있으며, 서제 오무(吳珷)가 있다.
35세 때 1751년(영조 27) 신미(辛未) 춘당대시(春塘臺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로 급제하였다. 1751년에 정언(正言)에 제수된 후 오찬은 징토를 엄히 할 것과 시비를 분명히 할 것 등을 상서(上書)하여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사직(司直) 이종성(李宗城)이 흉역(凶逆)들과 어울린다는 상서를 계속 올리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피임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같은 해 내수사(內需司)를 파할 것을 청하자 급기야 영조는 진노(震怒)하여, 오찬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성문 밖으로 쫒아냈다. 후에 삼수(三水: 함경남도 삼수군)로 귀양 보내져, 그곳에서 죽었는데 관직에 오른 지 1년 만이었다. 할 말을 다 하는 성격으로 관직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변방으로 쫓겨 가 그곳에서 죽자 사람들이 가엾게 여겼으며, 경쇠(磬―)를 매우 좋아하였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朝鮮王朝實錄
凌壺集
醇庵集
凌虛關漫稿
月谷集
朝鮮王朝實錄
凌壺集
醇庵集
凌虛關漫稿
月谷集
[집필자]
이은영
명 : "찬(瓚)"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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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