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李䎘)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774C219FFFFB1626X0 |
자(字) | 중우(仲羽) |
호(號) | 일휴정(逸休亭) |
시호(諡號) | 충헌(忠獻) |
생년 | 1626(인조 4) |
졸년 | 1688(숙종 1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우봉(牛峰)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유겸(李有謙) |
외조부 | 윤홍유(尹弘裕)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숙(李䎘)
1626년(인조 4)∼1688년(숙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중우(仲羽), 호는 일휴정(逸休亭).
부친은 참의 이유겸(李有謙)이며, 모친은 윤홍유(尹弘裕)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11세의 어린 나이로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사신으로 간 이덕인(李德仁)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1648년 진사가 되고,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수찬‧응교 등을 거쳤다.
1667년(현종 8) 집의로 있을 때 청나라 조정이 청나라 도피인을 돌려보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조선에 책임을 물어 당시의 재상들을 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지탄을 받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홍명하(洪命夏), 진주사(陳奏使) 허적(許積) 등이 그 책임을 오히려 왕에게 돌리자, 그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 맞서야 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크게 꾸짖고 처벌하도록 청하였다. 그는 당시에 이들을 파직시키기를 청하였던 김징(金澄) 등 7인과 함께 8간신(諫臣)으로 불렸다.
1669년 광주부윤(廣州府尹)을 거쳐 1672년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1675년(숙종 1)서인이 실각하자 한때 물러났으나 뒤에 재등용되어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687년 우의정에 올랐다. 대구의 상덕사(尙德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부친은 참의 이유겸(李有謙)이며, 모친은 윤홍유(尹弘裕)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11세의 어린 나이로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사신으로 간 이덕인(李德仁)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1648년 진사가 되고,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수찬‧응교 등을 거쳤다.
1667년(현종 8) 집의로 있을 때 청나라 조정이 청나라 도피인을 돌려보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조선에 책임을 물어 당시의 재상들을 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지탄을 받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홍명하(洪命夏), 진주사(陳奏使) 허적(許積) 등이 그 책임을 오히려 왕에게 돌리자, 그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 맞서야 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크게 꾸짖고 처벌하도록 청하였다. 그는 당시에 이들을 파직시키기를 청하였던 김징(金澄) 등 7인과 함께 8간신(諫臣)으로 불렸다.
1669년 광주부윤(廣州府尹)을 거쳐 1672년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1675년(숙종 1)서인이 실각하자 한때 물러났으나 뒤에 재등용되어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687년 우의정에 올랐다. 대구의 상덕사(尙德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增補文獻備考
肅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增補文獻備考
[집필자]
이남희(李南姬)
성명 : "이숙(李䎘)"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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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