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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李宗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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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고(子固)
호(號)오천(梧川)
시호(諡號)효강(孝剛)
생년1692(숙종 18)
졸년1759(영조 35)
시대조선중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태좌(李台佐)
5대조이항복(李恒福)
저서『오천집』

[상세내용]

이종성(李宗城)
1692년(숙종 18)∼1759년(영조 35). 조선시대 영조 때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 이항복(李恒福)의 5세손으로, 좌의정 이태좌(李台佐)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 진사가 되고, 1727년(영조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3일 만에 예문관설서가 되었다.

이듬해 경연(經筵)의 전경(典經)으로 시독관 박문수(朴文秀)와 함께 붕당 200년의 폐를 논하였으며, 그해 경상도암행어사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으며, 이인좌(李麟佐)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에 갇혀 있음을 보고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그뒤 부수찬헌납수찬교리 등을 거쳐 1729년 불법 수령 적발의 사명을 띠고 다시 영남어사로 파견되었고, 함경남도에 이어 북도안집어사(北道按集御史)로 다녀와 응교가 되었다.

1731년 관서어사로 파견되어 양덕현감 남윤관(南胤寬)을 파직시키고, 개천군수 홍태평(洪泰平), 맹산현감 이희하(李喜夏), 황주목사 이성제(李誠躋)에게 포상할 것을 상소하였다.

1733년 승지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고, 이듬해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양역(良役)의 폐를 상소하였다.

1735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어 용전(用錢)의 편리함을 논하고, 이듬해 탕평책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1738년 이조참판, 1741년 부사직, 1742년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744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판서형조판서대사헌개성부유수, 1749년 지돈녕(知敦寧)우빈객(右賓客)을 역임하고 1752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세자의 처벌에 적극적이었던 김상로(金尙魯) 등의 간계로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1753년 판중추부사, 1757년 내의원봉상시도제조(內醫院奉常寺都提調)가 되었다.

이때 인원대비(仁元大妃: 숙종계비 김씨)의 상을 당하여 의례의구조(疑禮儀九條)와 종묘 혼전(魂殿)의 예의칠조를 올려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58년 영중추부사가 되어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잘 보살폈다.

장조(莊祖)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오천집』이 있다. 시호는 효강(孝剛), 후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承政院日記
金石錄
恩坡集

[집필자]

이종호(李棕浩)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