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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충(鄭彦忠)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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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국이(國耳)
호(號)귀옹(龜翁)
생년1706(숙종 32)
졸년1772(영조 48)
시대조선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문서(鄭文瑞)

[상세내용]

정언충(鄭彦忠)
1706년(숙종 32)∼1772년(영조 48)(주1)
졸년
東萊鄭氏執義公派譜(1991)와 영조실록 48년(1772) 1월 25일 기사를 참고하여 졸년을 신묘(1771)에서 임진(1772)으로 수정함. 실록에 "‧‧‧생략‧‧‧이때 강계부사(江界府使) 정언충(鄭彦忠)이 상소하여 삼의 폐단에 대해 논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인데, 그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생략‧‧‧"이라고 나온다. 족보에 의하면 7월 7일에 졸하였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국이(國耳), 호는 구옹(龜翁).

정문서(鄭文瑞)의 아들이다.

1740년(영조 16)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48년 사헌부지평으로서 사간원정언 권항(權杭)과 함께 정시무과 초시에서 59인을 합격시킨 것은 원액(原額) 150인에는 태부족이므로 이에 따른 문제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같은해 10월에는 붕당의 폐를 논하기도 하였으며, 1754년 사헌부장령으로 천보되어 당시 국가시책의 급선무로서 붕당을 없애고 국가기강을 세우며, 언로를 개방하고, 백성의 생활안정을 추구하며, 군비를 갖추는 일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좌의정 김상로(金相魯)에 의하여 헌관(憲官)으로서 체통이 없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756년 장령에 다시 임용되었다.

그뒤 동부승지를 거쳐 1768년 나주목사로 전보되었다가 같은해 11월 형조참판에 임용되었으며 승지를 지냈다.

1796년(정조 20) 판윤 권엄(權欕)에 의하여 청백리로 천거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남인국(南仁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08-29東萊鄭氏執義公派譜(1991)와 영조실록을 참고하여 졸년을 수정함.[수정자: 이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