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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회(申晦)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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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근(汝根)
생년1706(숙종 32)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평산(平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신사철(申思喆)

[상세내용]

신회(申晦)
1706년(숙종 32)∼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근(汝根).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신사철(申思喆)의 아들이다.

1741년(영조 17) 진사가 되고, 174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수찬으로 등용되고 1746년 교리가 되었다.

1750년 승지가 되었으나, 그해 사마시의 합격자 발표에 관한 절차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의 주장이 공정성을 잃었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유배되었다.

그뒤 유배가 풀려 돌아와서 근신하던 중 1755년 병조판서에 복직되고,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1762년 영조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일 때 이에 적극 동조하였다.

그뒤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들어왔다.

1772년 좌의정이 되고 이어서 영의정이 되었다.

그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76년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왕의 죽음을 알리고 시호를 청하며 왕위계승을 고하는 고부 겸 청시승습사(告訃兼請諡承襲使)로 임명되었으나, 그가 일찍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동조하였다 하여 정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그뒤 1784년(정조 8) 관작이 회복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