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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하(元景夏)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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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화백(華伯)
호(號)비와(肥窩)
시호(諡號)충문(忠文)
생년1698(숙종 24)
졸년1761(영조 37)
시대조선중기
본관원주(原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원명귀(元命龜)
조부원몽린(元夢麟)
저서『창하집(蒼霞集)』

[상세내용]

원경하(元景夏)
1698년(숙종 24)∼1761년(영조 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화백(華伯), 호는 창하(蒼霞)비와(肥窩).

효종의 부마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麟)의 손자이며, 목사 원명구(元命龜)의 아들이다.

1721년(경종 1)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736년(영조 12)에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로 정시문과에 장원하였다.

1739년에 영조의 뜻을 받들어 완소(緩少)계열과 함께 정언으로 붕당이 나라를 그르치는 화근이 된다는 것과 탕평책을 진언하였다. 아울러 신임사화로 화를 입게 된 조태억(趙泰億)조태구(趙泰耉) 등을 신설(伸雪)하는 데에 앞장섰다.

1743년에 예문관제학봉상시제조를 거쳐 이해 7월에는 청나라 고종이 북순(北巡)할 때 와언(訛言)이 많이 일어나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당상(備局堂上)들을 입시하게 하여 자강책을 강론하게 할 때 폐사군(廢四郡)의 복설(復設)을 진언하였다.

이듬해에는 이조참판으로 판서인 이기진(李箕鎭)과의 마찰로 이기진홍주목사로, 자신은 청풍부사로 외보되었다가 곧 내직으로 복귀하였다.

1745년에 부제학으로 “호남의 크나큰 폐막(弊瘼)은 전정(田政)만한 것이 없는데, 이 전정의 문란은 오로지 은결(隱結)이 토호(土豪)들에게 넘어가 이민(吏民)이 백지징세(白地徵稅)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호남사정에 밝다고 하여 호남진전개량사(湖南陳田改量使)가 되었다.

그는 임정(任珽)정우량(鄭羽良)오광운(吳光運)윤유(尹游) 등과 조정에서 노론‧소론만의 탕평인 소탕평(小蕩平)을 반대하고, 동서‧남북을 다 포함한 대탕평(大蕩平)을 창도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옛 동료로 사감이 있던 이천보(李天輔)와 절교를 선언하니 이로부터 두 사람은 구적(仇敵)같은 사이가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이로 인하여 원붕(元朋)‧이붕(李朋)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노론들은 원경하가 탕평으로 자임하지만, 송인명(宋寅明)조현명(趙顯命) 등에게 아부하여 경반(卿班)에까지 올랐고, 남모르게 남인과 소북들과 결탁하여 자기세력을 도왔다고 하였다.

그밖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탕평노력과 당인들을 고루 대하는 인품을 칭송하였다.

특히,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고 그의 탕평책에 많은 귀를 기울였다. 판돈녕부사로 치사하여 봉조하가 되었다. 그가 죽자 왕이 친히 제문을 지었으며, 해당 관조(官曹)에 명을 내려 치제하게 하고 관재(棺材)를 관급하였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창하집(蒼霞集)』 10권이 전하여진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이미지]

[집필자]

이봉래(李鳳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