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발영(任發英)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84BC1CC601B1539X0 |
초명(初名) | 임상균(任尙均) |
이명(異名) | 임발영(任拔英) |
자(字) | 시언(時彦) |
호(號) | 와헌(瓦軒) |
생년 | 1539(중종 34) |
졸년 | 1593(선조 26)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장흥(長興)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부 | 임희성(任希聖) |
공신호 | 호성공신(扈聖功臣) |

[상세내용]
임발영(任發英)
1539년(중종 34)∼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시언(時彦), 호는 와헌(瓦軒). 초명은 임상균(任尙均), 이명은 임발영(任拔英). 본관은 장흥(長興).
임희성(任希聖)의 아들이다.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그뒤 뜻을 바꾸어 무과를 지망하였는데 평소 그의 이름을 알고 있던 시험관이 원서를 받아주지 않자 왕에게 소를 올렸고 왕은 그 뜻을 기특하게 여겨 선전관으로 특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서 두 손으로 종묘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모시고 왕을 의주까지 따라가니 왕이 크게 감격하여 손을 잡고 위로하였으며, 그날로 무과를 보게 하니 그 무과는 오로지 그를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무과에 급제한 뒤 안주목사가 되고 이듬해에는 운량사(運糧使)로 군량수송에 공을 세웠다.
1604년 공신을 책정할 때에는 이미 사망한 뒤였으나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으로 책정되어 예양군(汭陽君)에 추봉되고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임희성(任希聖)의 아들이다.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그뒤 뜻을 바꾸어 무과를 지망하였는데 평소 그의 이름을 알고 있던 시험관이 원서를 받아주지 않자 왕에게 소를 올렸고 왕은 그 뜻을 기특하게 여겨 선전관으로 특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서 두 손으로 종묘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모시고 왕을 의주까지 따라가니 왕이 크게 감격하여 손을 잡고 위로하였으며, 그날로 무과를 보게 하니 그 무과는 오로지 그를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무과에 급제한 뒤 안주목사가 되고 이듬해에는 운량사(運糧使)로 군량수송에 공을 세웠다.
1604년 공신을 책정할 때에는 이미 사망한 뒤였으나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으로 책정되어 예양군(汭陽君)에 추봉되고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南海邑誌
南海邑誌
[집필자]
이정일(李貞一)
대표명 | 임발영(任發英) |
성명 | 임발영(任發英) |
성명 : "임발영(任發英)"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