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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탁(金聖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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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진백(振伯)
호(號)제산(霽山)
생년1684(숙종 10)
졸년1747(영조 23)
시대조선중기
본관의성(義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태중(金泰重)
외조부김여만(金如萬)
저서『제산문집』

[상세내용]

김성탁(金聖鐸)
1684년(숙종 10)∼1747년(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진백(振伯), 호는 제산(霽山).

부친은 김태중(金泰重)이며, 모친은 순천김씨호군 김여만(金如萬)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통달하여 인근의 각광을 받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에는 의병을 일으키고, 창의소(倡義所)에서 토역문(討逆文)을 각 지방의 유문(儒門)에 보내어 의병에 가담할 것을 적극 권하였다. 그 공로로 인하여 안핵사(按覈使)의 추천을 받아 참봉에 임명되었다.

1734년 어사 박문수(朴文秀)이조판서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다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감진어사(監賑御史) 이종백(李宗伯)의 추천으로 사과(司果)에 기용되어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를 역임하였다.

또한 상소하여 치국평천하의 도를 건의하고 왕도정치를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이어서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37년 이현일(李玄逸)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정의(旌義)에 유배되었고, 그뒤 광양으로 이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문장가로 조정의 총애를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지지하였다.

저서로는 『제산문집』 16권이 있다.

[참고문헌]

霽山文集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대표명김성탁(金聖鐸)
성탁(聖鐸)
성명김성탁(金聖鐸)
진백(振伯)
제산(霽山)

성명 : "김성탁(金聖鐸)"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震史記略v7書時輩之疏語阿諛用權之宰相其專攻上身百倍谷永請正顯弼不敬之罪誅考官不嚴之心後仍坮啓拔榜邊配○五月玉堂金聖鐸疏臣年陳前黨論之沈痼士習之不正大爲一邊所憎湖伩李海老斥臣以陰秘凶巧岺儒申目臣以詖言誣說醜詆之辱至及於
震史記略v7謂主張凶論者豈不寃哉臣知殿下於己巳之事付之先天而竊自痛以臣之故辱及師門上震怒嚴鞠○八月豊原君趙顯命疏金聖鐸之妄言將抵於死是其自取固不足惜然其實則玄逸根本聖鐸枝葉根本之玄逸死於牖下枝葉之聖鐸斃於桁楊其本末輕重
桐巢漫錄v2今上丁巳校理金聖鐸 辭疏略曰嶺儒申瀗 疏斥臣以詖言誣說醜詆之辱又及臣師李玄逸 至比昏朝賊臣仁弘 在臣生三事一之義豈思泯
辛壬紀年提要v12十三年丁巳七月大臣金在魯宋寅明等請復金昌集李頤命官上不許時修撰金聖鐸疏訟其師李玄逸與昏朝賊臣仁弘比竝戴盆之冤四十餘年臣知殿下於己巳事付之先天而辱及師門不避猥越上設鞫嚴問
郯述v04金聖鐸
鶴塘銓攷v1靖陵參奉○金聖鐸李萬敷李
太常諡狀錄v40之心初不盡平而然也此由於度量不弘芥滯未祛也豈不大可悶哉歷正言兵曹正郞選知製敎丁巳入弘文館爲修撰會嶺人金聖鐸投疏訟其師李玄逸之冤語甚叵測上命鞫之將施護逆律豐原君趙顯命疏救甚力上亟削顯命職承旨李壽沆等迭救顯命公
戊申倡義錄n1-2책(安東義兵軍門坐目)參謀進士金聖鐸 義城人牧使克一五世孫崇禎處士是榲曾孫經學文章爲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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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