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택현(沈宅賢)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2ECD0DDD604B1674X0 |
자(字) | 여규(汝揆) |
시호(諡號) | 청헌(淸獻) |
생년 | 1674(숙종 즉위) |
졸년 | 1736(영조 12)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청송(靑松)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심속(沈涑) |

[관련정보]
[상세내용]
심택현(沈宅賢)
1674년(숙종 즉위)∼1736년(영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여규(汝揆). 영의정 심속(沈涑)의 아들이다.
1699년(숙종 2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장령‧필선‧부교리‧집의‧대사간‧이조참판 겸 실록청당상‧경기관찰사와 이조‧공조‧형조‧예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우참찬‧한성부판윤‧세자빈객‧판의금‧판돈녕부사‧좌참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11년 장령으로 있을 때 공론(公論)이 사의(私意)를 이기지 못하여 당론이 점차 폐해가 되므로 탕평의 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한때 소론의 탄핵으로 낙향하였다가 1725년(영조 1)에 재등용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노론이 대거 파직될 때 다시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며 2년 뒤에 서용되어 홍치중(洪致中)과 함께 이인좌(李麟佐)의 난 원인을 소진하고, 신임사화 때 죽은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의 노론 4대신의 신원을 건의하였다. 시호는 청헌(淸獻)이다.
1699년(숙종 2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장령‧필선‧부교리‧집의‧대사간‧이조참판 겸 실록청당상‧경기관찰사와 이조‧공조‧형조‧예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우참찬‧한성부판윤‧세자빈객‧판의금‧판돈녕부사‧좌참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11년 장령으로 있을 때 공론(公論)이 사의(私意)를 이기지 못하여 당론이 점차 폐해가 되므로 탕평의 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한때 소론의 탄핵으로 낙향하였다가 1725년(영조 1)에 재등용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노론이 대거 파직될 때 다시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며 2년 뒤에 서용되어 홍치중(洪致中)과 함께 이인좌(李麟佐)의 난 원인을 소진하고, 신임사화 때 죽은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의 노론 4대신의 신원을 건의하였다. 시호는 청헌(淸獻)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英祖實錄
知守齋集(兪拓基)
英祖實錄
知守齋集(兪拓基)
[집필자]
장필기(張弼基)
명 : "택현(宅賢)"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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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