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유봉(魚有鳳)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5B4C720BD09B1673X0 |
자(字) | 순서(舜瑞) |
호(號) | 기원(杞園) |
생년 | 1672(현종 13) |
졸년 | 1744(영조 20)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함종(咸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어사형(魚史衡) |
저서 | 『기원집(杞園集)』 |
저서 | 『경설어록(經說語錄)』 |
[상세내용]
어유봉(魚有鳳)
1672년(현종 13)∼1744년(영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순서(舜瑞), 호는 기원(杞園). 어세공(魚世恭)의 9대손이고, 한성부우윤 어사형(魚史衡)의 아들이며, 경종의 장인 어유구(魚有龜)의 형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으로 1699년(숙종 2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이때에 과거시험의 부정을 보고 대과의 응시를 단념하였다. 뒤에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가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이 되었다.
1706년 우의정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를 받고 천안군수에 임명되었고, 1718년에 장령을 거쳐 이듬해에는 집의에 올랐다.
경종이 즉위한 뒤 양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22년(경종 2) 신임사화로 그의 스승 김창협이 화를 당하자 유생들과 함께 그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관직에 다시 복귀하여 집의‧사복시정을 역임하고, 1734년(영조 10)에는 호조참의에 오른 뒤, 이듬해 승지가 되었다.
1738년 세자시강원찬선이 된 뒤 영조로부터 지극한 대우를 받으면서 세자의 스승으로도 불렸으나 1742년에 그는 자신이 맡고 있는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퇴하였다.
그는 당대의 학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학문적으로는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이간(李柬)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지지하였으므로, 이른바 낙론(洛論)에 속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이천보(李天輔)‧홍상한(洪象漢)‧윤득관(尹得觀)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기원집(杞園集)』‧『경설어록(經說語錄)』이 있고, 편서로는 『오자수언(五子粹言)』‧『논어상설(論語詳說)』‧『주자어류요략(朱子語類要略)』‧『대월첩(大越帖)』‧『풍아규송(風雅閨誦)』 등이 있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으로 1699년(숙종 2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이때에 과거시험의 부정을 보고 대과의 응시를 단념하였다. 뒤에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가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이 되었다.
1706년 우의정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를 받고 천안군수에 임명되었고, 1718년에 장령을 거쳐 이듬해에는 집의에 올랐다.
경종이 즉위한 뒤 양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22년(경종 2) 신임사화로 그의 스승 김창협이 화를 당하자 유생들과 함께 그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관직에 다시 복귀하여 집의‧사복시정을 역임하고, 1734년(영조 10)에는 호조참의에 오른 뒤, 이듬해 승지가 되었다.
1738년 세자시강원찬선이 된 뒤 영조로부터 지극한 대우를 받으면서 세자의 스승으로도 불렸으나 1742년에 그는 자신이 맡고 있는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퇴하였다.
그는 당대의 학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학문적으로는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이간(李柬)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지지하였으므로, 이른바 낙론(洛論)에 속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이천보(李天輔)‧홍상한(洪象漢)‧윤득관(尹得觀)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기원집(杞園集)』‧『경설어록(經說語錄)』이 있고, 편서로는 『오자수언(五子粹言)』‧『논어상설(論語詳說)』‧『주자어류요략(朱子語類要略)』‧『대월첩(大越帖)』‧『풍아규송(風雅閨誦)』 등이 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淸選考
燃藜室記述
淵泉集
景宗實錄
英祖實錄
淸選考
燃藜室記述
淵泉集
[집필자]
오갑균(吳甲均)
명 : "유봉(有鳳)"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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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