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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李載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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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가회(嘉會)
호(號)송암(松巖)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665(현종 16)
졸년1741(영조 17)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학자 > 유생
이응징(李應徵)
생부이응서(李應瑞)
조부이성(李晟)
증조부이상효(李尙孝)
출신지함경도 경성(鏡城)
묘소귀덕동(歸德洞)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재형(李載亨)
1665년(현종 6)∼1741년(영조 17).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회(嘉會), 호는 송암(松巖).

증조부는 이상효(李尙孝)이고, 조부는 이성(李晟)이며, 부친은 이응서(李應瑞)이다. 모친은 양천허씨(陽川許氏) 허종윤(許宗胤)의 딸이다. 함경도 경성(鏡城)에서 태어났다. 1667년(현종 8) 후사(後嗣)가 없이 죽은 당숙(堂叔) 이응징(李應徵)의 후사가 되었다. 최신(崔愼)에게 사숙하였다. 또 1685년(숙종 11)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을 찾아가 수학하기도 했다.

1713년(숙종 39)에 부교리(副校理) 홍치중(洪致中)이 북로(北路)의 문학지사(文學之士)로 천거하였다. 1722년(경종 2)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의 천거로 소지(召旨)가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31년(영조 7)에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가 되었다. 1740년(영조 16)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나 노병(老病)으로 인해 나아가지 못했다. 1741년(영조 17)에 1월 29일에 사망하였다. 경성(鏡城) 서쪽 귀덕동(歸德洞)에서 장사지냈다.

1828년(순조 28)에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되었고, 1863년(철종 14)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다. 당시 그는 북관(北關)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불리웠고, 노론(老論) 계열에서 그에게 대단한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의 시문은 사후(死後)에 가장(家藏)되었다가, 초고(草稿)가 아들인 이함(李涵)과 문인들에 의해 수습되었는데, 총 6권 3책으로 『송암집(松巖集)』으로 명명하여 간행되었다. 내용은 성리학자답게 시작(詩作)은 몇 편 되지 않고 대부분이 지구(知舊) 문인(門人)들과 나눈 서간(書簡)과 기타 잡록(雜著) 등이다. 초간본은 현재 규장각,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松巖集
韓國文集叢刊解題

[집필자]

김영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