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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익(鄭亨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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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시해(時諧)
생년1664(현종 5)
졸년1737(영조 13)
시대조선중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제선(鄭濟先)
5대조정광경(鄭廣敬)

[상세내용]

정형익(鄭亨益)
1664년(현종 5)∼1737년(영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시해(時諧). 참판 정광경(鄭廣敬)의 현손으로, 지평 정제선(鄭濟先)의 아들이다.

1687년(숙종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04년 송시열(宋時烈)의 뜻을 받들어 유생 160여명과 함께 명나라 신종(神宗)의 사우(祠宇)를 세울 것을 상소하여 처음으로 금원(禁苑)에 황단(皇壇)를 건립하게 하였다.

참봉세마(洗馬) 등을 역임하고, 전라도 금구현령김제군수를 거쳤다.

1719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자궁(資窮)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오르고, 동부승지가 되었다.

경종이 즉위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있었는데, 이무렵 김일경(金一鏡)경종의 생모 희빈장씨(禧嬪張氏)을 위하여 호(號)를 정하고 사우를 세우려 하자, 그가 항소(抗疏)하여 불가함을 주장하다가 신임사화 때 노론 4대신과 함께 파직되어 김해로 유배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다음해인 1725년 배소에서 대사간으로 기용되어 언관의 중책을 맡았다. 이무렵에 궁위(宮衛)와 보사(輔嗣)를 엄하게 할 것을 소론(疏論)하였는데, 이는 권귀(權貴)를 꺼리지 않는 주장이었다.

이듬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부연(赴燕), 청나라에 다녀왔고, 1727년(영조 3) 도승지대사성대사헌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다가 이해에 소론이 재등장한 정미환국으로 파직되었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평안감사로 나갔다가 예조판서에 승진하였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우참찬으로 재직하다가 죽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雷淵集
知守齋集

[집필자]

반윤홍(潘允洪)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